올 여름은 무더웠고 비가 많이 내렸다. 날씨 소식들이 잘 팔려나갔다.
2023년 8월 24일 오후, 쏟아지는 예보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기사가 출고되었다. <폭우로 잠긴 도로 배수구 뚫은 동네 아저씨 '귀감'>이라는 제목이었다. 츄리닝을 무릎까지 걷고 회색 민소매를 입은 한 아저씨가 대문짝만 하게 찍혀있었다. 충청북도 청주시 한 오거리, 침수된 도로의 배수로를 뚫고 있는 모습이었다. 기사의 요지는 이 사람이 사실 현직 도의원이었다는 데 있었다.
수상한 냄새가 났다. 출처는 한 커뮤니티 사이트였다. 키워드를 따라 들어가 보니 원문에는 도의원이라는 사실이 없었고 ‘동네 아저씨’를 칭찬해 달라는 내용만 있었다. 기사의 출고 시각은 15시 22분, 우리 언론사 외엔 기사가 나간 곳은 없었다. 보도자료도 아닌 것 같았다.
‘도의원이라는 건 어떻게 알게 됐을까?’·‘사진이 너무 절묘한데’·‘바이럴 아니야?’… 내가 불순한 음모를 키우는 사이 제목 말미의 ‘귀감’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부끄러워졌다. ‘연출이든 홍보든, 나는 저렇게 못했을 텐데….’ 본분에 충실했던 아저씨를 위해 나도 내 본분을 다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귀감을 어떻게 퍼뜨릴 수 있을까? ‘딱 하나의 묘사를 골라 단 한 줄로 사로잡아라’ 지난 ‘편집기자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바가 떠올랐다. 우선 내 눈은 아저씨의 후줄근한 민소매에 사로잡혔다. 영락없는 동네 아저씨 차림이었다. 그리고 혼자 있는 모습이 영웅 같아 강조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욕망한다고 했다. 정체는 숨기기로 했다. 그리하여 <홀로 배수로 뚫던 민소매 아저씨…알고 보니 ‘이 사람’>이라는 졸문을 걸었다.
포털에 출고했더니 조회수가 폭발했다. 내가 본 수치 중 최고였다. 쿵쾅거리는 마음 뒤로 ‘내용이 좋았던 결과지’라며 자랑을 삼켰다.
다음 날, 기사의 제목은 <침수된 배수로 뚫던 동네 아저씨…알고 보니 ‘이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퇴근한 뒤 다른 기자께서 바꾼 것 같았다. 순환 근무하는 온라인 편집에선 흔히 있는 일이지만 약간의 아쉬움은 남았다.
그런데 타사 대부분이 제목에 ‘민소매 아저씨’를 달고 잇달아 출고한 것을 발견했다. 댓글도 칭찬 일색이었다. 차마 눌러둘 수 없는 뿌듯함을 간직했고, 기회가 되어 이 자리에 철 없이 떠벌리게 되었다.
무더위는 지나가고 날이 추워졌다. 이제 내 제목은 전산내역에서 휘발돼 찾아볼 수가 없다. 남은 건 편집기자의 자부심뿐이다. 나는 또 다른 ‘민소매 아저씨’를 찾는 중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여름이 올 것만 같다.
-한국편집기자협회보 게재
(https://www.edit.or.kr/news/articleView.html?idxno=107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