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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상선 Nov 18. 2023

혼돈과 질서에 대하여-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열성적으로 추구하던 것의 민낯을 깨달을 때가 있다.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에 매달린다. 환영에 사로잡혀 우리를 도취상태로 만드는 것을 광기라고 불러야 할지, 강박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신경의 특별한 작용은 그것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냈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는 혼돈에 맞서는 어류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조던이라는 과학자가 등장한다. 어린 시절 별을 관찰하고 꽃을 모으던 수줍고 호기심 많던 이 소년은 1873년 루이 아가시라는 박물학자를 만나면서 삶의 궤적이 달라진다.      

<p22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루이 아가시는 자연의 사다리라는 개념을 주장한 학자였는데, 그에 따르면 자연은 하나의 종교적 텍스트다. 인간에게 가장 둔한 민달팽이나 민들레조차 영적, 도덕적 안내자가 되어 줄수 있다. 어떻게? 어류를 예로 들자면 어류의 껍질을 벗겨 뼛속과 연골, 내장을 보고 그 관계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신의 메시지가 각성으로 천천히 찾아들 것이다. 아가시가 충격적이라고 느낄만큼 인간과 유사한 어류의 골격 구조(작은 머리, 척추골, 갈비뼈를 닮은 돌출 가시)는 인간에 대한 경고였다. 인간이 자신의 저열한 충동들에 저항하지 못하면 자연의 사다리의 아래쪽에 있는 어류까지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다. 그것의 산 증인이 바로 비늘 덮인 어류라는 것이다.      

<p136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가시는 구조의 복잡성 혹은 단순성 또는 주변 세계와 맺는 관계의 특징같은 것을 생물의 객관적 척도라 믿고 그 척도를 사용해 모든 생물에게 등급을 매겼다. 도마뱀은 자손들을 더 많이 보살피기 때문에 자연의 사다리에서 어류보다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기생충은 모두 싸잡아 단연코 하등한 생명체다. 빌붙고 속이고 더부살이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은 참으로 사피엔스다운 것이고 편협하기 그지없지만 19c 후반만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을 잇는 거부할수 없는 이론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생물이 자연의 사다리에서 어떤 위치에 속하는지 알아보는 것은 신의 의도를 알아내는 방법이고 이런 도덕적 가르침은 인류가 한 걸음 더 진보하는데 도움이 될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p200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데이비드 스타조던이 했던 일들- 당대에 알려진 어류 중 1/5이 그와 그의 동료들이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각각의 종마다 이름을 지어주었다-은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해독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사다리는 다윈의 생각과 반대되는 것이었는데 다윈은 사다리는 없다고 했다. 우리가 보는 사다리의 층들은 우리 상상의 산물이며 진리라기 보다는 편리함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다윈에게 기생충은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경이였고 비범한 적응성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데이비드는 아가시와 다윈 사이에서 깊은 고민에 빠졌던거 같다. 하지만 결국 아가시를 선택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인류의 쇠퇴를 막는다는 명분하에 죽는날까지 열광적인 우생학자로 남았다. 또한 스탠퍼드 대학에서의 권력을 놓지 않으려 여러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가하고는 천연덕스런 태도를 유지했다.      


<p154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는 진실을 왜 못 본척 한걸까? 사다리에 대한 믿음을 반증하는 증거들이 주변에 널려있었다. 식물과 동물이 배열되는 방식에 관한 무서운 집착은 왜 죽는날까지 수정되지 않은 걸까?   

   

“처음 다윈을 읽을 때부터 마지막으로 우생학을 밀어붙일 때까지 어느 시점에서든 그 믿음을 놓아버리는 것은 다시 현기증을 불러들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방금 자신의 형을 앗아간 세상 앞에서 상실감에 가득 차 떨고 있던 어린 소년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세상 앞에서 그 세상을 전혀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겁에 질린 무력한 아이로 그 계층 구조를 놓아버리는 것은 삶의 회오리 바람을 풀어놓는 일, 딱정벌레와 매와 박테리아와 상어가 회오리 바람에 휩쓸려 공중으로 날아올라 그의 주변, 그의 위에서 빙빙 돌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것은 지독히도 방향 감각을 앗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혼돈이었을 것이다. 그 사다리가 데이비드에게 준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의 해독제. 하나의 거점, 중요성이라는 사랑스럽고 따스한 느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p206>     


<p34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22세의 어린 나이에 만났던 ‘자연의 사다리’는 혼란스럽게 을러대는 거친 파도 위 전복될 위험이 있는 작은 뗏목에서 자신을 건져낸 은인과도 같은 것이었다. 자연의 사다리는 그에게 세이렌의 목소리처럼 환상에 젖어들게 했고 데이비드는 그 환상을 쫓았다. 그리고 그 환상은 그에게 혼돈 대신 질서와 안정을 선사했다. 그리고 이후, 그 이야기는 색이 바래고 구멍이 나 폐기처분 판정이 났지만 끝까지 놓지 못했다. 그 이야기를 붙들고 있는것이 혼돈보다는 나으니까.      


책의 프롤로그에는 “혼돈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이라는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나는가 하는 시기의 문제다“ 라는 말이 나온다. 혼돈은 공기 같아서 늘 우리 주변을 맴돌다 어느새 불쑥 삶으로 끼어든다.   



  

중학교 2학년, 새 학기가 시작된지 두어달 쯤 지난 때였을 것이다. 종례시간에 짝을 바꿀거라고 하셨던 선생님은 숫자가 적힌 접은 갱지를 바구니에 담아 하나씩 뽑으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혜욱이를 떠올렸다. 혜욱이는 늘 상냥하고 리더쉽도 있던 친구였다. 그러나 정작 내  짝이 된 아이는 아이들이 날나리라고 속닥이며 옆에 가길 꺼리던 혜진이었다. 뒤쪽에서 3번째 자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새로운 자리로 가서 앉았다.    

  

혜진이는 코끝이 살짝 들리고 피부가 하얘서 귀여운 인상을 주었지만 키가 껑충해서 뒷모습만 보면 고등학생 같았다. 그 애는 수업 시간에 멍하게 턱을 괴고 있다가 졸기를 반복했다. 그러면 선생님들은 조용히 슬리퍼를 끌고 가 출석부로 혜진이의 머리를 탁 소리나게 때리거나 한심하다는 듯 흘깃거리며 짜증이 잔뜩 묻은 얼굴로 “김혜진“하며 소리쳤다. 그 애는 말수가 적어 내가 말을 걸지 않으면 먼저 말을 거는 일도 없었다. 누가 말을 걸면 경계하는듯 눈썹을 움찔거리기도 했지만 나한테만은 차차 배시시 미소를 띠던 순한 아이였다. 내게 날나리라는 개념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아이가 어떻게 날나리라는 것인가. 숫기가 없던 나는 나보다 더 숫기없는 혜진이가 마음에 들었고 우리는 곧 친해졌다. 쉬는 시간에 연습장에 바둑판을 만들어 오목을 두거나 매점에 함께 가서 빵이나 초코우유를 사고, 체육 시간에는 한 팀이 되어 피구와 발야구를 했다.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혜진이는 할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산다고 했다.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10분쯤 이동하면 나오는 산동네가 있었는데 나도 버스를 타고 가다가 본 적이 있었다. 아무렇게나 지어놓은듯 다닥 다닥 붙은 판자촌. 혜진이는 곧 쓰러질 듯 위태로운 그 곳에 산다고 했다. 그 외의 부모님과 관련된 소문도 무성했지만 정작 혜진이의 입으로 확인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들이 가장 기다리는 점심시간이 되면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꺼낸다. 그런데 점심 시간만 되면 언제 나갔는지 혜진이는 보이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끝날 즈음이 되어야 유령처럼 다시 스윽 자리에 앉곤 했다. 어디 갔었냐 다음부터 같이 먹자고 하면 다른 반에 점심을 같이 먹는 친구들이 있다고 둘러댔다. 그 애는 앞머리를 크고 둥글게 말고, TV에 나오는 소방차 오빠들처럼 다리가 부풀려진 옷을 입고 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혜진이가 날나리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에게 혜진이가 왜 날나리인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그 애가 방과후에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미팅을 하고 오빠들과 어울려 다닌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게 날나리가 아니면 뭐냐고 했다. 나는 혜진이가 날나리 짓을 하는 것을 애써 상상해보았다. 상상이 잘 되지 않아서 친구들에게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친구들은 들은 얘기이긴 하지만 사실이라고 우겼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노곤해져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체육이 들었던 날이라서 그런지 엎드린 채 공부를 하다 몽롱해져 깜박 졸고 있었다. 그러다 왠지 모를 무거운 공기가 감지되어 부스스 깼다. 빼꼼하게 열린 방문 틈새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빠가 경북 고향에 문상을 다녀와 늦은 저녁을 먹으며 엄마에게 나지막하게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영희 누야가 매형과 갈라서고 집을 나갔단다“ 아마 술집으로 흘러들어가지 않았겠나하는 얘기가 뒤이어 더 비밀스럽게 들려왔고 그래서 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 분은 아빠와 비슷한 연배의 사촌 누나로 이전에도 한 번씩 그 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주로 여자가 갖추어야 할 행실 미달에 관한 얘기였었다. 이제 그 분은, 그녀의 이야기를 할 때 쥐죽은 듯 속삭여야하는 그야말로 집안의 수치가 되었다.    

   

나는 혜진이에 대해 묻고싶은 것이 많았다. 엄마와 아빠는 어디에 있으며, 사는 곳은 어디고 너네 집에 놀러가서 장국영이 나오는 비디오를 볼 수 있는지, 방과 후엔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같이 시험공부를 할수 있는지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애의 관조하는 슬픈 눈을 보면 이런 말들이 꿀꺽 다시 삼켜졌다.  

   

어느 토요일 동생과 사거리 번화가에 나갔다가 혜진이를 보았다. 남자애들 몇 명과 여자애들의 무리에 혜진이가 있었다. 귀걸이를 하고 화장을 하고 어제까지만 해도 생머리였던 머리에 파마끼가 돌았고, 머리며 의상이 당시 한창 인기가 많았던 김완선을 연상케했다. 그러고보니 정말이지 팔, 다리가 유난히 긴 것이 김완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의 앳된 혜진이는 어디로 가고 훌쩍 어른이 되어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저 관조하던 슬픈 눈은 생기 가득한 번득이는 눈이 되었다. 나는 혜진이가 나를 알아볼까봐 동생 손을 채어 구석진 곳으로 가서 무리를  바라보았다. 혜진이는 무리에서 시리우스처럼 반짝거렸지만 난 어느새 손톱을 물어뜯으며 울적해졌다. ”언니 저 언니들 알아? 누군데 그래?“ 동생의 말은 곧 사람들 소리에 파묻혔고 아빠의 사촌 누나가 걸어들어갔다는 그 길로 혜진이가 흘러들어가 버릴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곳에서 혜진이의 혼돈을 잠재운 질서는 무엇이었을까? 혼돈의 현실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민 그럴듯한 이야기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이제야 드는 생각이지만 부디 데이비드만큼 말고 잠시 빠졌다 나올만한 작은 구덩이였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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