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공간,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
조해진의 <단순한 진심>은 주인공 나나가 자신의 옛 이름 “문주”의 의미를 찾기 시작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어린 시절 자신이 몸담았던, 이제는 변해버린 공간들과, 변해버린 공간에서의 여정을 함께 했던 인물들을 통해 내면이 성장하는 과정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이 소설에서 이름은 단순히 개인을 지시하는 기호가 아니라, 존재가 머물고 살아가는 일종의 '집'으로 기능한다. 나나가 자신의 이름 “문주“의 의미에 그리 집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이름이 또는 언어가 열어내는 공간 안에서 살아간다. 나나는 자신의 이름 '문주'를 통해 과거와 연결되며, 철길, 기관사의 집, 나사렛 고아원, 복희식당과 같은 장소들은 그녀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치유의 장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설 속에서 나나는 여러 장소를 통해 자신의 과거와 맞닥뜨리는데, 그 공간들은 현재 그녀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나나가 처음 기관사와 마주했던 장소는 청량리의 철길이었다. 철로에서 발견되었던 날을 기점으로 그녀는 생모와 살아왔던 시간과 단절되고 '문주'라는 이름 안에서 살게 된다. 철길은 생과 사의 경계, 불안정함의 상징으로 작용하며, 나나의 이후 삶에서 극단의 정체성을 갖는 계기가 된다. ‘철로‘라는 공간은 알 수 없는 의미의 '문주'라는 이름과 한 몸에서 생성됐기 때문에, 자매인 닉스(밤의 여신)와 헤메라(낮의 여신)처럼 떼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문주‘라는 단어의 뜻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알려줄 때도 드러난다. 나나는 ‘문주‘가 문기둥이란 뜻을 지닌 단어라는걸 알고 좋은 느낌을 받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먼지라는 뜻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서늘해진다. ’문주’라는 이름의 그림자는 강렬한 기억의 ‘철로’이므로 옅어지며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함께다. 그녀의 기억이 처음 시작되는 곳이 철로라는 것은 이후 방랑자나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암시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촬영을 위해 묵게되는 곳이 이태원, 즉 이타인의 마을인 점도 이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현동 기관사의 집은 문주가 그토록 원했던 소속감을 잠시나마 충족했던 공간이다. '아현'이라는 지명은 '애고개', 즉 조선 시대 사대문 밖, 죽은 아이들을 묻었던 매립지를 의미한다. 이름없이 죽어간 아이들 중 하나가 될 뻔한 나나가 문주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기관사와 그의 어머니가 자신들의 삶으로 그녀를 끌어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녀는 아현에서 1년간 '문주'로 살았고 수수부꾸미와 생과자의 단맛으로 그곳을 기억하게 된다. 그녀는 문주를 부르던 31세의 젊은 목소리의 우식과, 씻기고 먹이던 그의 어머니 수자 사이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 풀을 먹여 빳빳하고 깨끗한, 폭신한 침구에도 볼을 부볐을 어린 문주. 그러나 섬돌 위에 있는 자신의 운동화를 내려다보며 느꼈던 가족이 된듯한 뿌듯함은, 동시에 언제든 균열이 생길 수 있는 눈덮힌 빙하같은 불안한 소속감이었다.
이후 2년간 문주는 나사렛-나사렛은 예수가 자란 가난하고 소외된 곳- 고아원에 보내지고 '박에스더'라는 이름으로 붙박힌다. ‘박에스더‘란 이름에-‘문주’라는 이름과 달리-애정도 애착도 없었던 이유는 소속감의 결여와 연결된다. <고유한 경험이랄게 거의 없었기 떄문일 것이다. 비슷비슷한 이름들, 정해져 있는 시간표, 다른 고아들과 똑같은 분량으로 공유했던 결핍감과 불안감, 베로니카 수녀를 비롯한 여러 어른들의 평균적이고도 관습적인 애정, 때가 되면 해외로 입양되어 떠나는 아이들의 빈자리가 또 다른 아이들로 채워지는 무심한 반복이 내 감각을 무디게 했던 것이다>
프랑스로 입양되던 날 새벽, 고아원의 앞마당에 아끼던 손거울을 묻어버린 행위는-손거울 안에는 자신의 얼굴과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이 들어있었다- 자신을 암흑의 크레바스에서 건져냈다가, 다시 차디찬 암흑으로 떨구곤 다시 찾지 않았던 우식에 대한 애증의 표출이란 생각도 들었다.
위의 세 공간과 대조되는 곳이 복희식당이다. 복희식당은 이태원-어원은 '이타인의 마을'-에 위치해 있는데, 이 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전쟁 중 겁탈당한 여성들과 그 아이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타인으로부터 소외된 이방인들의 장소다. 문주는 복희식당 건물의 3층에 머무르게 된다. 그녀는 복희 식당에 몇 차례 방문하면서 연희와 가까워진다. 문주는 서영에게서 연희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데, 부모없는 한 아이를 맡아 기른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문주처럼 입양길에 올랐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이 식당 이름과 동일한 ‘복희’라는것도 알게된다. 문주는 서영이 연희의 무뚝뚝하고 공격적인 언행의 일화를 말하는 것을 듣고 연희에게 선입견을 가졌지만, 어쩐지 처음 본 연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백순두탕을 먹으면서는 자신을 배려해주는 연희에게 호감을 느낀다. 식당에서 경험한 위로는 단순히 음식에서 오는 물리적 만족이 아니라, 기관사의 어머니를 연상하게 만드는 따뜻함과 배려에서 느끼는 치유였다. 특히 문주의 기억 속, 비가 오는 날이면 수자가 만들어주었던 그 음식이 연희에게서 재현되자, 사위어가던 예전 기억들이 수런대기 시작한다.
<수수부꾸미, 속으로 되뇌며 한 점 집어 입에 넣자 빗소리와 비에 젖은 나무 냄새, 그리고 문주야 하고 부르던 목소리가 차례로 내 감각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생명력이 강하다는 수수는 강원도 땅에서만이 아니라 문주의 감각과 기억속에서도 가만히 오래 살아남았다. 수수부꾸미는 문주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상징적 음식으로, 문주가 이후 연희에게 책임을 느끼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수수부꾸미의 또 다른 추억이 만들어진 복희 식당은 문주에게 새로운 소속감과 함께, 자신의 존재를 다시 찾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개념처럼, 나나는 이 다양한 공간들에서 이름과 존재의 의미를 찾아간다. 청량리 철로에서 잃어버린 이름, 나사렛 고아원에서의 '박에스더'라는 이름, 기관사 집에서의 '문주', 그리고 복희식당에서의 ‘복희‘-럭키하고 럭키하다는 뜻-, 연희, 복순, 문경, 휘경, 수자, 우식이라는 여러 이름들과의 만남은, 이름들이 주는 아련한 의미와 느낌이 옅어졌다 중첩되고 웃자라거나 표랑하고 사라지거나 축소되기도 하면서 존재와의 관계를 재발견한다.
문주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자신의 이름 '문주'의 의미를 찾기 위함이었다.
<모든 처음의 기억-처음으로 입밖으로 내뱉은 말, 처음으로 가본 식당과 미용실의 풍경, 처음으로 웃고 울었던 계기. 처음으로 버림받음의 의미를 깨달은 순간도 내가 문주였던 날들에 속해있었다. 문주의 의미를 알아야 나의 역사도 시작될수 있는 것이다> P23
하지만 그녀는 이름을 지어준 기관사 우식이 이미 사망했음을 알게 되고, 이름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려워진다. 이로 인해 그녀의 원래 목적은 희미해졌지만, 그 과정에서 복희식당의 연희를 만남으로 내면의 성숙을 이루게 된다. 연희는 복희를 기다리며 "복희"라는 이름이 내걸린 간판으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이는 연희가 과거와 인연을 놓지 않고 복희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방식이자, 자신에게 남아 있는 치유의 가능성을 붙잡는 모습이다. 문주는 복희식당을 방문하며, 연희가 보여주는 삶의 방식에 끌리게 된다. 그녀는 연희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연희의 간병을 자처하며 연희의 삶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여러 사람에게 받았던 무구한 호의 ’하나의 생명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삶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실천하게 된다. 문주는 단순히 이름의 의미를 찾으려던 여행에서 벗어나, 연희와 복희의 사연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발견하고, 그들을 통해 내면의 성장을 경험한다. 벨기에에 살던 복희는 한국을 방문해 병실에서 연희를 만나게 되는데, 연희는 그토록 기다렸던 복희와 한 마디도 나눌수 없다. 복희는, 연희가 자신을 입양보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고 있었으면서 이해하지 않으려 했던 마음을 돌아보게 된다. 몸을 숙여 연희를 안는 순간 그녀가 안은 사람은 연희이면서 동시에 그 시절의 자신이라는 진실을 깨닫고 자신과도 화해한다.
한편, 문주는 과거의 사람들을 모두 포용하게 되었지만 상상속 생모와의 관계만은 쉽지 않다. 생모에 대해 언급했던 장면이라면 기관사의 한옥에서의 인터뷰가 떠오르는데, 문주는 생모를 자신을 다시 버린 기관사보다 덜 원망했다고 짤막하게 말했다. 이 대목에서 내가 느꼈던 건 수면 아래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깊은 증오다. 미움과 증오라는 것은 먼저 사랑을 전제한다. 생모에게는 무엇도 받은 기억이 없으므로 그 보다는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었던 기관사를 더 원망한 것이다. 생모에 대한 적의를 현실화시켜 탄생한 듯한 노파-문주가 이름을 물어보지 않는 한 사람, 11명의 아이를 낙태시킨 인물-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기관사의 어머니를 만나게 된 이후 문주도 자신의 생모에게 덧씌운 누명한 가지를 벗기고 객관적인 사실 하나를 첨부한다. 그 누명의 실체는 생모를 미워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기억으로, 생모가 자신을 철로에 버리는 장면이었다.
이로써 문주는 과거에 자신이 느꼈던 따뜻했지만 불안한 소속감과는 다른, 더 깊은 차원의 연결과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뱃속의 아이 우주와, 버려진 자신과 가족이 되어주었던 앙리와 리사, 기관사의 가족, 비슷한 처지인 복희와 더 깊이 연결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생모에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기억해달라는 단순한 진심의 편지를 쓴다. 용서는 아니지만 자신의 내면 공간 안에 의자를 하나 마련하고 살아있는 자신을 지켜볼 권리를 생모에게도 나눠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