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구하는 실천가 Apr 23. 2023

우산을 사는 자유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비가 쏟아진다. 모자를 쓰고 있었기에 그냥 참고 집까지 가보려 했지만 제법 빗줄기가 굵다. 짧은 고민 끝에 근처 가게에 들어가 우산을 샀다. 비 오는 날 오천 원짜리 우산을 거침없이 사는 행위. 이것은 우습지만, 어릴 적 나의 로망이었다.


  어릴 때는 왜 그렇게 비가 자주 왔던 것일까? 등교를 앞둔 아침이면 창밖의 빗소리가 그렇게 자주 들렸다. ‘내가 쓸만한 우산이 있을까’ 걱정스러운 맘으로 여기저기 집 안을 살펴보면, 멀쩡한 우산 하나가 잘 없었다. 우산대가 망가지거나, 손잡이 부분이 빠진 우산들뿐이었다. 그나마 우산대가 조금 휘어진 녹이 슨 우산을 골라 엉거주춤 잡고 걸어가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우산은 왜 그리 멀쩡하고 예쁜지, 또 왜 바람은 그렇게 쌩쌩 불던지, 그래서 항상 내 우산만 바람 속에서 속절없이 뒤집어지던지. 덕분에 나의 초라한 우산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내 기억에 우산을 돈 주고 사 본 것은 거의 어른이 되어서였다. 어릴 적엔 어디에선가 버려진 우산을 엄마가 주워오는 것인지 집에는 항상 고장 난 우산들이 여러 개씩 있었고, 그 우산들이 있는 한, 우산은 돈 주고 사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 나에게 제대로 된 우산은 사치품이었다. 어른이 되어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은 이후로도 멀쩡한 우산을 내 돈 주고 산 기억이 거의 없는 이유는 사은품처럼 들어온 우산이 생겼고 그 후로는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집과 직장을 논스톱으로 다녔던 탓이 아닐까 한다.


  우산 하나처럼 계층에 따라 추억은 이렇게 다르게 생긴다. 누군가에게는 전혀 생기지 않을 감정이 생채기처럼 남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빗물에 반사된 아름다운 추억으로 아른거리기도 한다. 얼마 전 <사랑의 이해>라는 드라마는 이런 사물이 주는 계층의 의미를 잘 보여주었다.  계층이 다른 주인공들이 마시는 커피의 종류, 그리고 자동차라는 선물을 주는 부자 여자친구의 말에 반응하는 남자친구의 태도, 각자의 신분에 따른 취미의 차이 등에서 인물들의 감정은 복잡하게 교차한다.


 얼마 전 머그컵을 샀다. 집에도 머그컵이 있지만 내가 원하는 머그컵이 온라인 쇼핑몰에 보였기 때문이다. 컵과 우산이라는 소비재, 나의 꿈은 딱 그 정도였던 것 같다. 길 가다 비가 오면 편의점에서 쉽게 하나 더 살 수 있는 우산, 집에도 있지만 내가 원하는 것으로 추가 구매할 수 있는 컵.


 빈부 격차가 클수록 구매 욕구는 더 높아진다고 한다. 내가 어떤 물건을 삼으로써 그 정도의 지위를 획득하였다는 증명, 하지만 빈부 격차가 크지 않으면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물건은 굳이 사지 않는다고 한다.  이 나이를 먹게 되고 또 보통의 삶을 유지하면서 이제 후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경제적 층위 속에서 최소한의 필수품에 대한 소비 욕구도 견뎌야 하는 자와 명품 소비를 위해 돈을 모으는 자와 그 이상의 삶을 사는 자로 나뉘어 있다. 나 또한 나의 사회적 지위를 증명하기 위한 소비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여유를 부려봐도, 어릴 적 결핍 어딘가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소비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