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납작한 말들>을 읽다가 든 생각
"선생님, 00가 '어쩔'이라고 했어요."
"00아, 무슨 말을 하고 싶었니? “
“@@이가 제 말이 틀렸다고 먼저 무시했어요. ”
“그랬구나. 00아, 그러면,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에게 물으면 어떨까? 아니면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하면?”
아이들 사이에 퍼져있는 말, 앞도 뒤도 없이 그냥 내뱉는 말.
"어쩔", "어쩌라고"
어른들이 하는 말도 그와 비슷하다.
”억울하면 00 하던가“
우리는 말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나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을까? 감정만 전달하는게 아닐까? 나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에게, 또 내 기분을 나쁘게 하는 사람에게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는 일은 피곤하고 짜증 나는 일이다. 그래서, 그냥 툭 던진다. 맥락 없이. 납작한 말을.
이렇게 제대로 된 생각을 전하지 못한 말은 발화자의 감정만을 오롯이 강하게 드러낸다. '난 네 말 듣기 싫어. 네가 틀렸어. 넌 못난 사람이야. 넌 무조건 아니야.'와 같은 감정들만.
또한 발화자의 말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생각하거나 속한 시대적, 문화적 지향도 전달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로하려고, 또 응원하려고 이런 말을 한다.
'힘내세요.' '극복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장애인들에게 하는 말이다.
무슨 힘을 내라는 것일까, 무엇을 극복해라는 것일까. 그저 일상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뜬금없는 응원의 말이 전달된다. 비장애인의 차별과 멸시를 극복하라는 것인가, 세상의 차별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사는 힘을 내라는 말인가.
여기서 힘을 내고 극복해야 하는 것은 이들이 아니다. 장애인들을 힘들게 만드는 비장애인들이 그 시선에서 그들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이 극복하는 힘을 내야 한다. 물론 말하는 사람의 선한 의도를 말꼬리 잡고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나의 의도와 달리 좋지만 납작한 말들 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헤집어 보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점의 원인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해야 할 것은 그들이 아니고 나와 세상이라는 사실. 나도 모르게 나에게 숨겨져 있는 납작한 생각들을 끄집어내어 펼치는 시간과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자기주장만 외치다 결국 도돌이표가 되어 돌아오는 한국 사회의 토론 문화가 좀 더 숙성될 것이다. 과거에는 무디었던 말의 속성들에 대해서 이처럼 섬세하게 접근한다면 말속에 숨어 있는 어떤 지향, 어떤 가시, 어떤 의도, 어떤 무지를 비로소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한창 이슈였다.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
아이돌에게, 정치인에게, 또 누군가에게 이 질문은 여러 파장을 각오하고 답해야 하는 문제 질문이 되어버렸다.
마치 중세 시절, '당신은 지동설입니까?'처럼, 조선 후기에 '당신은 예수쟁입니까?'처럼 마녀사냥을 위한 정치적 질문이 되어버린 측면이 있다.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일반화되기 전부터 좋아했고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방향이라 믿어온 나의 입장에서 최근에 이렇게 '페미니스트'가 마치 입에 담기 힘든 위험한 사상처럼 번지는 것에 그리고 이 페미니스트라는 말의 해석에 대한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런 말의 왜곡에 대한 심각함을 느끼는 이 책의 작가조차도 토론의 장에서 자신의 말이 자신의 주장에 이율배반된다는 것을 누군가의 지적을 통해 깨닫는다. 결국 나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자신도 모르게 편견을 비판하면서 편견이 숨어든 말을 내뱉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언어에 숨어있는 맥락, 문화 그 속에 담긴 발화자의 숨겨진 의도, 차별, 혐오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이 이유는 우리 스스로 자신들의 생각과 유사한 책이나 sns에 갇히게 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살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도 내가 선호하는 종류의 책을 자꾸 읽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인터넷도 우리가 관심 있는 바를 어떻게든 알아내서 우리에게 추천하고 우리는 거기에 혹해서 끌려든다. 결국 편없는 시선을 갖는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 되었다.
작가를 비롯한 우리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말속에 숨은 나의 내면을 나도 모르게 내뱉는다.
얼마 전 80주년 광복절이었다. 광복이 되면 우리는 비로소 어둠을 물리치고 빛을 찾아 눈을 뜰 줄 알았다. 하지만 그 후의 역사는 일제암흑기와 별반 다르지 않을 만큼 험난하였다. 일제시기는 그래도 적이 누구인 줄 알았다. 친일을 할지언정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독립운동을 하지는 못할지언정 마음으로 온 국민이 소망하고 염원하였다. 하지만 지난 80년간 우리는 좌와 우가 되어,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이 되어, 남과 여가 되어, 성장과 복지의 한 편이 되어, 능력과 공정의 한 축이 되어 자신의 주장을 외치다 못해, 상대를 증오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가볍고 납작한 말들로. 내 편이 아니면 적이 되는 말들로. 분단 80년 동안 말들은 더파편화되거나 굴절되어 더욱 납작해졌다.
건전한 토론은 없다. 아이들은 자기 말을 내뱉고, 화가 나면 '어쩌라고' 하고 외치면 그만이다. 어른들은 '억울하면 00 하던지', 또는 '빨갱이, 친북, 반공'을 내세우면 그만이다.
우리 교실에는 <학급 온도계>가 있다. 학생들이 무심코 뱉는 말 중에 따뜻한 말이 들리면 한 칸을 올린다.
누군가의 잘못된 말에, 어떤 학생은 '넌 그것도 모르니?'라고 하지만 어떤 학생은 '괜찮아, 모를 수도 있지.'라고 한다. 그 순간 나는 얼른 그 말을 알아듣고 바로 온도계 한 칸을 올린다. 교사가 옳고 그름을 말로 판정 내리지 않고 조용히 바른말을 하는 학생을 통해 전체 보상이 주어진다. 그 순간 아이들에게 한 마디의 말의 힘이 전달된다. 예전에는 경쟁 놀이를 하면 반 분위기가 오히려 나빠져서 힘이 빠졌다. 이긴 팀에서 목소리 큰 학생이 '우하하, 우리가 이겼다. 히히히'하고 비웃듯 진 팀을 향해 웃고, 진 팀에서는 '선생님, 쟤들이 우리 놀려요. 쟤들 반칙했단 말이에요. 이 놀이 재미없어요.' 등 불만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이제는 이긴 팀에서 이기자 마자, 먼저 나오는 말이 '괜찮아, 질 수도 있어.' '너희도 잘했어'이다. 그러면 진 팀도 표정이 밝아진다. 그 말에 진심이 안 들어가도 일단 상대를 인정하는 말에서 출발하면 된다. 말의 힘은 그만큼 세다. 마음은 천천히 따라와도 된다. 표현하지 않는 진심보다 진심 없는 둥근 말이 더 강할 때도 있다. 결국 말에 의해 진심이 생겨나기도 드러나기도 한다.
우리는 말하기 전에 일단 멈춰야 한다. 나의 말이 나의 관성에 의한 납작한 말인지, 감정에 따른 뾰족한 말인지. 아니면 나의 생각을 전하는 다양한 굴곡을 가진 울퉁불퉁하지만 둥근 말인지. 그리고 나의 말속에 납작한 편견이 숨어 있는 걸 발견했다면, 기꺼이 온기를 불어넣어 둥글게 팽창시킬 준비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