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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에 관심은 없지만 뱃살은 빼고 싶어

by 연구하는 실천가

10~30대 때는 남들처럼 사는 것, 소위 '정상성'을 삶의 목표로 살아왔다. 다시 말해, 남들처럼 번듯한 직장에 남들처럼 아파트에, 남들처럼 적령기에 결혼해서 자식이 있는 것, 그 '남들처럼'에 집착하였다. 그러한 ‘정상성'을 놓칠까 봐 노심초사하며 살았다.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부족했던 정서적, 경제적 결핍들이 내게 그런 두려움을 심어주었으리라.


한창 정상이 되고자 노력했던 나는 이제 나이를 먹어서인지, 정상성을 어느 정도 획득했다고 여겨서인지, 점차 세상의 정상성을 벗어나고 싶어졌다. 괜히 세상의 기준을 비틀어보고 싶기도 하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기도 하다. 이는 나 자신을 보살피며 살지 못한 또 하나의 결핍이거나, 결국 나만의 기준도 정상성을 획득한 후에야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사치품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 이제 피부의 주름과 기미 따위 신경 쓰지 않고 화장도 하지 않는다. 머리도 자르는 것 외에 아무런 관리를 하지 않고 부스스하게 있다 거추장스러우면 하나로 휙 묶는다. 옷도 브랜드는 관심 없고 편하고 싼 것을 구매해 오래 입는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굳이 연을 맺지 않는다. 세상 유행과 반대로 걷는 걸 즐기며 시골 아낙 같은 모습에 만족한다.

그런데. 나의 이런 일관성을 방해하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바로 뱃살이다. 남편이 전혀 가꾸지 않는 나의 외양에 대해서 평소 별 말을 안 하다가 가끔 꾸미기를 권하는데 그때를 놓칠세라 나는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며 큰 소리를 친다. 하지만 타이트한 옷을 입을 때 드러나는 내 뱃살을 들먹일 때는 나의 저항하는 목소리가 한없이 작아진다.


나이를 먹으면서 남과의 비교, 특히 외모에 대한 비교는 다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한 짓이라 비웃던, 그래서 남들이 관리된 외양으로 명품백을 들 때, 나는 부스스한 머리 그대로, 뻔뻔한 맨얼굴로 에코백을 들고서 나의 길을 간다고 생각하는 내가 왜 뱃살에 대해서만큼은 당당하지 못할까? 왜 뱃살을 당당히 내밀고 수영장을 런웨이 하지 못하는 것인가?(최근 수영을 배우고 있는 나는 수영복 위로 도드라진 나의 뱃살에 낯을 가리는 중이다.) 나 스스로도 튀어나온 배에 대해서만큼은 어떤 나의 절대적 가치로도 나 자신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 스스로도 맞는 논리인지 헷갈린다.

때로는 나에게 주입해 본다. ‘인간은 원래 빈궁기를 대비해 뱃살이 발달하도록 진화되어 왔어. 어느 정도의 뱃살은 진화의 결과이고 자연의 법칙이야.(이 논리는 내 머리에서 나온 것이므로 근거는 없음) 그런데 왜 뱃살 있는 사람이 자기 관리에 실패한 게으름뱅이 취급을 받으며 눈치를 봐야 하나. 외모나, 가진 물건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지, 뱃살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결국 뱃살을 마주하는 순간, 나 또한 세상의 기준 속에서 뱃살은 보기 흉하며 (건강에 나쁜 것은 별개로 두자. 나 또한 건강 문제로 뱃살을 빼야 하는 상황이니까) 둔해 보이니까 없애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


뱃살을 빼고 싶은 나의 모순도 외모 지향이라는 본능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 아기들도 예쁜 사람에게 호감을 보이니까. 나 자신도 잘 생긴 남배우의 영화나 드라마에 더 몰입이 잘 되니까.

하지만 본능이라는 미명아래 동물적 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인간은 본능을 이기며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을 추구하는 존재니까.


요즘은 정상성의 기준이 딱히 없어지면서 다양성이 곧 정상성이 된 것 같아 다행이다. 이제 결혼도, 자식도, 직장도 집도 미션을 수행하듯 어느 시기에 해내야 하는 과제가 아니니까.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이제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아이를 가지든 아니든 어떤 것도 비정상성이라며 걱정하지는 않지만 sns와 같은 곳에 삶을 전시하며 정상성 이상의 과시성을 드러내며 살아야 잘 사는 삶이 된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그들을 보며 그렇지 못한 자신을 비정상이라 느끼며 자괴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또 많아진 느낌이다. ‘재테크 능력, 고가 물품, 멋진 몸, 특별한 취미와 여가' 등 기준들이 다양해졌지만 그 또한 '남들처럼' 또는 '남들보다'에 목매며 사는 것은 같아 보인다. ’ 남보다 나은 나, 잘난 나‘를 세상 속에 보여야 나는 잘 살고 있다고 안심하는 이들과 그들을 보며 자신이 정상성이 아니라 괴로워하는, 결국 누구도 자신의 기준은 없는 것이다. 결국 세상이 말하는 정상성이라는 가치가 새로운 기준으로 바뀐 것일 뿐 ‘남들처럼’이라는 상대적 정상성의 가치는 또 우리를 판단하는 세상의 눈이 되어 그 가치를 위해 달리게 하고 세상의 기준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는 나 자신의 존재 가치는 생각할 여력이 없다.


나 또한 과거에 그랬다. 시류와 세상의 관점에 맞추려 내가 편하고 좋은 것보다 남들에게 보기 좋은 것을 선택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백화점에서 카드 할부로 유행에 맞는 브랜드 옷을 사고, 메이컵 기법을 배워서 얼굴을 작게 보이려 음영과 색조를 넣어 화장을 했다. 눈알이 빨개져도 안경을 벗고 렌즈를 끼웠다. 내가 세상에서 배척될까 봐,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나는 자신이 없었다.


이제 나는 뱃살만 극복하면 된다. 세상의 가치에 맞추어 뱃살을 빼든, 나만의 절대적 가치로 뱃살을 당당하게 내밀든.(그래도 건강을 위해서 빼긴 뺄 것이다. 그때까지 당당하게 내밀어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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