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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과 착함의 불편함에 대하여

by 연구하는 실천가

"선생님, 할머니예요?"

우리 반 영악한 한 녀석에게 뜬금없이 날아든 질문.

언젠가 받으리라 예상한 질문이지만, 생각보다 빠르고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예상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래, 할머니야. 왜 할머니가 나쁜 거야?"

아직 할머니라기엔 억울한 나이지만 8살 아이들 입장에서는 할머니에 가까운 나이기는 하였다.

침착한 척 대답하면서도 내 또래 선생님 중에 잘 관리해서 40대처럼 젊게 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기에 나에게 들이닥친 이 질문에 나는 가벼운 충격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니에요."

몇몇이 손사래를 치며 강하게 부정하였다.

질문한 아이는 뭔가 아쉬운지 한 번 더 짓궂게 말했다.

"할머니는 안 좋은데, 빨리 죽잖아요."

나도 짓궂게 응대했다.

"아닐걸? 건강한 할머니는 오래 오래 살 수 있고, 장난치고 규칙 안 지키는 어린이는 사고로 빨리 죽을 수도 있을 걸? 나이 순으로 죽는 거 아닌데? “


"그래도, 우리 선생님은 착하잖아."

나의 위기를 보다 못한 한 아이의 변호 아닌 변호의 그 말이 짓궂은 아까 그 아이 말보다 내 마음을 더 날카롭게 지나갔다. 그 아이의 의도는 분명 좋은 것이었겠지만.


"야, 이 정도면 40대, 아니 30대로 보이지 않아?"

"아냐, 당신 나이로 보여."

항상 늙어 보이고 싶지 않은 남편은 머리를 자르거나 옷차림을 점검할 때면 이런 말을 하고 내게 동의를 구했다. 그러면 나는 냉정하게 그 말을 막아버린다. 외모 전성시대 속에서 많은 중년들은 자신의 외모를 젊게 보이게 하기 위해 애를 쓰고, 누군가는 나이 든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한다고 추하다며 '영포티'라 비웃는다.


"야, 이 카페에서 우리가 제일 나이 많지 않아. 우리가 분위기에 안 맞는 사람이 된 거 아냐?"

"왜? 난 우리가 있어서 더 다양한 계층이 즐기는 멋진 카페로 보이는데?"


나의 우격다짐의 논리에 남편은 나름 만족한 듯 불안함을 거두는 영포티, 아니 영피프티가 되어 마음을 놓는다.


이렇게 늙음이라는 것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에 거부감을 가지는 나에게 '착함'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왜 진짜 거부감이 드는 걸까?

교사로서 착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가지는 미묘한 불편함일까? 교사들은 ‘무섭지만 좋은 선생님’을 최고의 칭찬으로 친다.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면서 아이들과 교감하는 능력자니까. 그에 비해 늙었지만 착한 선생님이라니, 그래서 봐준다는 의미?로 느끼는 나 자신이 사실, 늙음과 착함에 대한 열등감을 굳이 감추려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임이 들킨 듯 자괴감이 드는 것은 아닐까.


사실 늙어 보이고 싶지 않지만 늙음에 당당한 척은 하고 싶고, 착해 보이고 싶지 않지만 말랑말랑 착한 이미지일 수밖에 없는, 나는 결국 늙고 착해 보이는 선생님이다.


할 수 없지. 뭐.

착하게 늙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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