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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Jan 14. 2024

가방 분실로 시작한 미국 출장

그럼에도 세상은 여전히 살만 하다는 것!

"남은 출장기간 저는 무조건 겸손해지기로 했어요!"

"(제게)뭐든 시키세요. 다 할 수 있어요"

(상대방의 표정에서 어이없음과 미소가 묘하게 교차한다)

"네, 허허"(웃음)


샌프란시스코 도착 첫날. 북쪽에 위치한 피어39 항구. 늦은 오후쯤 일행이 도착하고 함께 동행한 기자의 보도영상 클로징 멘트를 따기 위해 주말저녁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항구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면서 잠깐 나눈 대화다. 먼 타국에서 길었던 하루의 마지막 일정만 남긴 그 순간. 나의 체력은 거의 바닥을 쳤다. 하지만 마음만은 뭐든 하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노란빛의 석양이 비추는 부두 바로 아래. 수십 마리의 바다사자가 무리 지어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잠시 시선을 빼앗겼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며 영상작업을 돕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이건 공무출장이라고!'


첫날 저녁시간의 다소 뜬금없는 나의 겸손함은 그냥 이유 없이 온 것이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찾아온 스스로에 대한 다짐 비슷한 것이다. 비행기 도착 후 내 이름으로 보낸 가방 두 개 중 하나가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급기야 공항직원에게 짐을 찾아달라고 요청하였고, 나머지 일행을 먼저 내보내고 일행 중 한 명과 짐 가방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컨베이어벨트 주변을 연신 서성거렸다. 불안했다. 내일 협약식을 치르기 위한 모든 물품이 거기 안에 들어있었다. 수개월을 준비한 행사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망칠 순 없었다. 차라리 개인 짐가방이면 좋으련만 왜 하필 그 가방이 분실되었는지. 세상은, 인생은 이래서 가혹하다고 하는 걸까.


도저히 나머지 일행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항공사의 현지 직원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내 명함을 주고 다시 한번 간곡하게 부탁했다. 중요한 행사를 위한 가방이니 꼭 좀 찾아서 전화를 달라고. 그렇게 일행들이 기다리는 출국장으로 올라갔다. 무거운 분위기를 느낄 여유도 내겐 없었다. 그 가방을 못 찾을 경우, 무엇을 해야 할지 그것만이 그 순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축 처진 어깨에 백팩을 메고 버스 맨 앞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실수와는 관계없이 그냥 죄지은 기분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행사를 무사히 치를까.


그 순간 들고 있던 휴대폰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화버튼을 누르는 순간 다급한 여자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방을 찾았어요. 내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있는 걸 꺼냈어요!"

아! 정말 그 순간 나는 거의 앞으로 꼬꾸라질 뻔했다. 가방을 찾았다는 안도와 기쁨에 나도 모르게 다시 그 직원이 한 말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믿기지 않아서다. 그렇게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서 가방을 손에 꼭 쥐고 버스 짐칸에 실은 후. 나는 결심했다. 겸손하자. 수백 개의 가방 중 하필 그 가방이 컨베이어벨트에 끼어서 못 나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앞으로 이 먼 이국땅에서 4박 7일의 출장기간 동안에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이 나를 놀라게 할지 너무도 쉽게 예상되었다. 그렇다.


가방이 없어져서 겪었을 불편함에 비하면 그 순간 나는 천국에 있는 듯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일까. 세상을 다 품을 정도로 마음이 넓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보였다. 다음 일정으로 찾은 도시재생 견학지 현장에서. 계속되는 보안요원들의 제지로 영상과 인터뷰 작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자들의 모습이. 사건사고 현장을 찾아 보도영상을 만드는 것이 일상인 직업이지만 그 순간 나는 오전 공항에서 난처함에 가득한 내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뭐든 도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공항에서 일행 한 명이 가방을 찾기 위해 묵묵히 내 옆을 지켜주었듯이.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했다. 결과는 그 이후의 문제다. 다행히 세 번째 시도만에 LA에서 온 복숭아빛 불그스름한 뺨을 가진 젊은 여행자의 인터뷰를 딸 수 있었다.


세상은 어찌 보면 확률 싸움이다. 처음 두 명의 무심함을 견딜 수만 있다면 3~4번째에는 반드시 마음씨 좋은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비난해도 그 순간 내 마음은 세 번째까지 무조건 시도해 보자였다. 그리고 결국 성공했다.


그렇게 미국에서의 하루하루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로 다채롭게 채워지고 있었다. 다행히 첫날만큼 치명적인(?) 사고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의 심적 충격이 너무 컸던지 웬만해선 나를 놀라게 할 수도 좌절시킬 수도 없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바로 전날. 모든 일정이 끝난 늦은 저녁시간. 누군가 깜짝 시내 투어를 제안했다. 이미 몇 차례 이 도시를 방문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기에 처음 방문한 내게는 거절할 수 없는 호의였고 동시에 꽤나 신선한 경험이었다.


늘 공무출장의 실무담당자 위치에서 일정과 일행을 챙겨야 했던 나. 그래서 나를 위한 누군가의 가이드가 낯설었던 건 당연했다. 하지만 단 1시간만이라도. '챙겨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오롯이 내가 좋아하고 끌리는 장소를 찾아 발걸음을 향하고 고 사진 찍고 아이처럼 아이스크림도 먹는 그런 시간. 컨베이어벨트에 가방이 끼는 사건처럼 이번 출장에서 나를 완벽하게 무장해제시킨 두 번째 큰 사건이었다. 첫 번째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상황이지만 나름 괜찮은 순서다. 이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상상하면 솔직히 좀 끔찍하지 않은가.


여전히 세상은 살만한 곳이다!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들이.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다는 이 느낌. 출장의 피로감과 함께 기억까지 사라지기 전에. 나는 그때의 유쾌한 시간을 이곳에 영원히 저장 중이. 언제 떠날지 모를 다음 공무출장지에서 힘든 순간순간마다 가끔씩 꺼내서 읽다 보면 누군가 내게 베푼 작은 호의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닌 현재의 살아있는 든든한 동행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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