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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에 Jan 08. 2020

팀장이 되고 마주한 불편한 진실

매니징과 디자인 사이에서의 갈등 & 커리어에 대한 고민

어렸을 때는 반장이거나 부반장이었다. 기억을 돌이켜보건대 초등학생 때는 그게 좋아서 나서서 했던 것 같고, 중고등학교 때는 주로 더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는 친구들이 반장을 하고 내가 부반장으로 뽑혔다. 학창 시절 12년을 지내면서 거의 또는 모두(확실하진 않지만) 반장, 부반장으로 지내왔던 시간들이 아마 내겐 그리 싫은 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매번 하게 되면서 거절하거나 정말 싫다는 생각이 드는 적도 없었고 누군가의 지지를 받는다는 인정의 욕구가 충족되었던 건 아닐까 추측한다.


그러던 내가 이상하게도 디자인과에 가서는 좀처럼 쉽게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아직까지도 종종 인스타그램에 보이는 대학 동기 모임에서도 나를 딱히 부르지는 않는다. 다른 친구들이 과 활동을 하고 소모임을 할 동안 나는 '동아리'에 더 충실했던 대학생이었고 그래서 대학 동기보다 동아리를 하게 알게 된 다른 학교의 동아리 임원진들과 더욱 돈독히 지내며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며 대학시절을 보냈다.


그러한 배경으로, 이제 와서 드는 유일한 아쉬움은 디자이너로 살아가면서 주변에 디자이너가 너무 없다는 것이다. 디자인과 생활을 조금 열심히 했거나 소모임이라도 했다면 아는 디자이너 친구들이 많았겠지만, 나는 동아리를 하면서 그것까지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고 무엇보다 디자이너가 될 거란 생각도 없었던 터라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나마 조금 친해졌던 과 친구들은 회사 내 디자이너가 아니라 프리랜서나 작가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내가 실질적으로 고민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마찬가지로 스타트업의 디자이너로써 시니어 디자이너가 없었고, 신입으로 들어와서 덜컥 팀장까지 되어버린 이 마당에 제대로 처음부터 길을 걸었을 리 만무하다. 역할과 권한으로 이리저리 많이 다퉜고, 하나뿐인 팀원은 그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했다. 그래도 그나마 갈피를 잡고 역할과 권한을 정리하고 이제 앞으로 나아가면서 발전해나갈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정작 더 큰 하나가 남아있었다.




내 마음이 불편했다.


디자이너가 되지 않으려 했던 것은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가진 일반적 특성들이 나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첫 글에도 적었지만 야근, 박봉, 을의 위치 같은 것. 직업적 특성들은 그러했지만 '디자인'이라는 것 자체는 내게 작은 즐거움이었다. 중요도를 나누고 필요성을 따지고 그걸 적절하게 배치하고 때론 내 생각이나 감정을 그냥 표현할 수 있는 그래픽까지. 완성된 모습을 보면 뿌듯했고 중간 과정들을 쭉 나열하며 디자인 프로세스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 안정감이 들었다. 애초에 디자인을 택한 것도 즐거워서 택한 것이었고, 여전히 나는 디자인을 할 때 즐거웠다.


그런데 팀장이 되면서 점점 디자인을 할 기회가 줄어들었다. 이건 어느 누가 발생시킨 문제도 아니고 그냥 내 안에서 울부짖는 소리였다. 디자이너가 아니라 팀장이 되어야 한다고 자꾸만 이성이 다그쳤다. 그리고 점점 실제로도 매니징을 위한 워킹타임이 늘었고, 조금 큰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세부적인 매니징을 구상하고 업무분장을 하느라 워킹타임을 써야만 해서 디자인에 직접 손을 댈 기회는 더욱 줄었다. 게다가 온갖 회의에 참석해서 디자인팀을 대표해 이야기하고 일정을 조율해야 했다.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이 더욱 확장되었고 어느 날은 자리에 앉아있는 시간보다 회의실에 들어가 있거나 티타임을 가지는 시간이 더 많았다.


혼란스러웠다. 나는 디자이너인데? 그것도 한참 경력을 열심히 쌓아야 하는 1년도 안 된 신입 디자이너인데. 물론 내가 맡은 일이 매니징 하는 것이고 팀장이란 직책이지만 내가 원한 것도 아니고 해 본 것도 아닌데. 막중한 책임만 덜컥 얹어놓고 그걸 순전히 받아들이는 내가 좀 어리석게 느껴지면서도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어 같은 회사의 마음으로 그 시간들을 버텨냈다.


디자이너로써 디자인을 하지 않는 것은 꽤 괴로웠다. 나도 발산하고 싶은 아이디어나 이미지가 있는데 표현할 수가 없다니! 게다가 난 해야 할 말은 해야 하는 타입인데, 디자인력을 표출하지 못해 답답했다. 그래서 팀장을 맡은 초창기에는 실제로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같이 시안을 그리고 디자인팀끼리 모여 시안을 모아 디벨롭을 반복했다. 나는 적당히 만족스러웠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며 머리로나 마음으로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팀장이나 관리직에 앉는다는 것은 실무로써 그 일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즐거움을 빼앗기고 한동안은 조금 무기력하게 살았다. 회사에 피해가 가지 않을 만큼 일은 했지만 마음이 내키거나 열정이 솟아오르진 않았다. 그즈음부터 디자이너로써 성장할 수 있는 것들은 회사가 아니라 무엇이 있을지 찾아보기 시작했고, 외부 강연을 들었고 아주 멀지 않은 날에 이 회사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디자인에서 꽤 많은 부분 손을 놓았고, 평화로워졌다. 관리직이 실무를 겸하게 되면 아무리 공정하고 공평하게 의견을 나눈다 한들 다른 디자이너 두 분의 의견 제시가 적어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팀장'이라고 붙은 이름의 무게가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조금 어렵고 낯선 팀장이라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두 실무자의 생각과 발전을 존중하고 싶었고, 두 분의 작업물에서 내가 알아챌 수 있는 발전 요소를 언급해주거나 방향이 전혀 다를 경우 바로잡아주는 것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때로 실무자들이 종종 이전과는 다르게 발상하거나 나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디벨롭시킨 작업물들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기도 했다.


머리로 인지하고 마음은 평화로워졌다 한들, 디자인이 내 즐거움인 것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나는 디자인에 목마른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 결핍을 어떻게 채울까 고민하다가 개인 프로젝트 겸 끄적이는 용도로 이모티콘을 그려보기도 하고, 디자인팀 스터디를 만들어 그래픽 디자인을 진행하기도 했다. 또 간간히 실무의 손이 필요할 때 함께 작업하며 에셋을 제작하거나 외주를 통해 리플릿이나 포스터 디자인을 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모든 방법들이 꽤 효과가 있었고, 나는 굳이 회사가 아니더라도 내 디자인을 꾸준히 하고 발전시킬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물론 퇴근해서도 모니터를 보고 프로그램을 켜서 작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디자이너라는 것이었다. 조금 먼 미래를 생각했을 때 여전히 디자인 직군에 있다면 언젠가는 관리자가 되고 그 역할에 충실하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단순히 매니징 하나만 겪었지만 커리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꽤 연차가 쌓이기 전까지는 디자이너로 배우고 성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더욱 분명해졌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어느 것 하나 의미 없는 것이 없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다.


커리어에 대한, 또는 내가 하고 싶고 가야 할 길에 대해 분명히 생각하고 방향을 가지고 있다면 회사 생활을 하거나 직군에서 활동을 할 때 많은 불안과 갈림길을 분간할 수 있는 뚝심이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팀장을 하고 매니징을 해보면서 조금 늦게 깨달았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본인의 커리어는 어떻게 되면 좋겠는지, 최종적으로 무엇을 향해 가고 싶은지 시간을 내어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어디로 가든 그게 자신의 길이 될 테지만, 정반대의 길을 걷는 것보다 방향은 정해두고 방황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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