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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에 Dec 03. 2019

글을 쓰는데도 계획이 필요하다

글감 정리의 시작


저는 이런 걸 쓰고 싶고요, 이런 순서로 연재할 거예요.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한 분들이라면 필수적으로 하는 코스다. 나 역시 그랬고, 제발 작가 선정에 떡하니 붙어라 하고서 구구절절 '저는 이런 분야에서 남들과는 다른 경험으로 글을 쓸 수 있어요!'를 열심히 어필했었다. 분명히 내 기억에 그때 쓴 목록과 연재순서들을 복사해서 어딘가에 붙여 넣기 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온데간데없었다. 그나마 비축해두었던 글감들이 덩어리로 '아 뭔가 쓰려고 했었는데'같은 느낌으로 머릿속에만 남아있었다. 그래서 테크크런치 후기를 쓰고는 한동안 도무지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무작정 시작하려니 이건 뭐 길도 없고 답도 없고... 하얀 모니터는 도화지고 내 손은 펜인데 움직이지도 않고... 내게 쓴 메일함과 메모장을 뒤져도 과거의 그 글감 목록들이 나오지는 않았다. (나왔다 하더라도 짤막한 목록이었으므로 금방 글감은 동났겠지만, 작가가 되었으니 뭐라도 자꾸만 써서 업데이트하고픈 마음엔 그 짧은 목록마저도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아 진짜 그때 분명히 복사 붙여 넣기 해서 어딘가에 뒀는데 하는 미련을 가지고 한참을 그 목록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이번엔 행운이 내 편이 아니었던 듯 어디에서도 그 목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어젯밤에 끝내주는 디자인 컨셉이 떠올라서 분명 어디에 적었는데 어디에도 없는 느낌... 분명 저장 버튼을 눌렀는데 픽 하고 돌연사해버린 디자인 툴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을 찾기에 몰두하다가 도무지 나오지 않자 그냥 깔끔하게 마음을 접고, 아예 새롭게 쓰기로 마음먹었다.


어디에 글감 목록을 쓸까 하다가, 노션이 떠올랐다. 브런치에 오기 전에 이런 장문의 글들을 노션에 쓸까 고민했던 시절이 있어서, 노션 계정은 준비되어 있었다. 무겁지 않고, 웹이나 앱 모두 있고, 어디서든지 계정으로 접속하면 내용을 수정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보이는 UI가 상당히 깔끔하고 예뻐서 선택했던 서비스였다.


빈 페이지를 생성하고 '글감 목록'이라고 떡하니 제목을 붙인 다음에 '쓰고 싶은 큰 주제'에 대해 몇 가지 적었다. 일단 내 생활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스타트업 디자이너의 삶', 정말 삶의 시시콜콜한 부분들에 대한 '이것저것에 대해서', 아직은 실제로 쓸지 말지 고민 중인 '지극히 사적인 에세이'정도로 구분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그 주제에 해당되는 쓰고 싶은 주제들을 와구와구 적어나갔다. 이게 잘 어울릴까? 같은 고민은 이 단계에서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런 글감은 글을 쓰거나, 후에 목록을 볼 때 '어울리지 않은데?'하고 뺄 기회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투두 리스트 형태로 제목 부분에는 큰 주제를 적고, 바(-)를 하나 붙여서 나름대로의 소제목을 적었다. 개인적으로는 제목과 함께 소제목을 적어두는 것이 내가 이 주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글을 전개해 나갈지에 대해 지침이 되어주는 것 같아서 든든했다. 그리고 짧은 제목으로 못다 한 속마음을 적기도 했다. 그렇게 적어둔 걸 보면서 괜히 혼자 킬킬거리며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쓴 글들은 링크와 함께 체크! 완료했다는 의미의 취소선을 보며 보람도 느낀다.


쓰고 보니 어떤 일정한 패턴이 보이는 것도 흥미로웠다. '스타트업 디자이너의 삶'이라는 주제의 경우 쓰고 보니 시간 순으로 글감 목록을 작성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직장생활이 처음이었고 현재 진행되는 요소다 보니 첫 입사부터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 글감을 뽑아냈던 듯하다. 무엇보다 차마 그때 당시에는 하고 싶지만 하지 못했던, 또는 해야만 했으나 시기를 놓쳐버렸던 말들이 자꾸 떠올라서 글감을 죽죽 써 내려가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신기한 게 처음엔 무엇에 대해 써야 하나를 한참 고민했는데 시간 순으로 되짚다 보니 할 말이 마구 쏟아졌다. '아, 이런 사건도 있었지.'같은 기억이 떠오르고 목록에 추가되곤 했다.


반대로 '이것저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주제가 다채로웠다. 아직 쓰지도 않았고 미래에 안 쓸지도 모르지만 글, 여행, 집 구하기, 일러스트레이션 등 회사생활 외적으로 내가 관심 있는 것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이것저것 관심이 많아서 다행인 순간이었다. 관리가 안된 채로 마구 자라 버린 뒤뜰을 보는 심정으로 글감 목록을 보다가 혼란이 가중되기 전에 라벨링을 해서 가지치기를 했다. 다시 한번 카테고리화의 힘을 느꼈다. 깔끔히 정리되어 보기도 좋았다. 만족!


앞의 괄호 라벨링으로 한결 알아보기 쉬워진 글감 목록


글감 목록을 정리하고 나자 든든했다. 내일 무얼 먹을까 빈 냉장고를 보며 걱정하는 마음에서 대강 이런 걸 해 먹기 위해 필요한 재료들을 채워둔 것 같았다. 물론 계란말이를 해 먹기 위해 계란을 사 왔지만 마음이 바뀌어 계란찜을 해먹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뭐 어찌 되었든 계란을 이용한 요리라는 것은 변함이 없고, 그때 내가 필요한 욕구(국물이 있는 계란 요리를 먹고 싶다!)를 채워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게 아닐까 싶다. 사실 계획은 자주 바뀌고 때론 완전히 뒤집히기도 하니까. 무엇보다 내가 관심 있는 것들로 글감을 채워 넣으니까 내가 관심 있어하는 주제는 이런 쪽이고, 또 어떤 일을 겪었을 때 특정 감정을 느꼈구나가 분명해져서 좋다. (주로 부제목을 적는 과정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또 글감을 정리하다 보니 이건 따로 아예 큰 다른 주제로 빼도 좋겠다는 것들이 눈에 보였다. 예를 들어 여행기 같은 것들은 굳이 '이것저것에 대해서'의 주제로 넣는 것보다는 여행이라는 카테고리로 빼던지, 또는 사진이 많고 그 여행 당시에 느낀 경험이 판이하게 다른 것을 살려 여행지마다의 주제로 빼도 좋을 것 같다는 아이디어가 스쳤다.


비슷한 의미로 카테고리화를 미리 해두고 그 안에서 글감을 뽑아내다 보니 후에 글이 좀 쌓이면 브런치 내에서 제공하는 브런치 북으로 묶는 것도 더욱 쉬워질 것 같다. 하나하나 아주 완벽하진 않지만 그 결들이 같은 글들을 쌓아서 만드는 글 모음도 그 나름대로의 맛이 생길 것을 생각하니 글 쓰는 게 두렵거나 망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약간의 조급함이 생겨서, 얼른 글을 쌓아 올려 진한 향기가 나게 하고 싶다는 마음마저 든다. 서두르느라 너무 정돈되지 않은 글들을 쓰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




커버 이미지 : Photo by Ella Jardi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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