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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계피 May 14. 2022

프로 N잡러의 시대, 문학인의 생존

생활과 작업, 작가들의 생존 전략

나는 생활문학인이다.


그런데 "생활문학인"이라는 게 뭐죠?


내가 생각하기에 좁은 의미의 생활문학인이란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업무를 보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을 말한다. 이때 좁은 의미에서의 생활문학인 특징은 프리랜서 보다 삶이 안정돼 있다는 점이다. 안정이란 엄청난 경제적인 부와 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프리랜서의 삶을 살 때보다 안정적이라는 점 정도. 매달 나오는 일정한 급여, 매달 보장되는 월차, 1년이 지나면 나오는 퇴직금과 연차, 직장에서 해고당하지 않을 권리와 안전하게 노동할 권리를 최소한으로 보장받고 있는 작가들, 나는 그들을 생활문학인이라고 부른다.


넓은 의미의 생활문학인란 생활을 하며 문학을 하는 사람 모두를 지시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밥을 먹고 운동하고 그리고 앉아서 글을 쓰는, 그런 것들을 매일매일 꾸준히 해내는 사람들. 또는 아이를 유치원에 바려다 주는 일,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버는 일처럼 각자에게 발생하는 생활을 각자의 영역 안에서 기꺼이 수행하는 모두가 생활문학인이다. '나'라는 존재가 살아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생활을 기꺼이 감수하고 해내는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나는 이 두 가지 생활문학인 개념 안에서 대체로 좁은 의미의 생활문학인으로 나를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나를 생활문학인이라고 소개할 때마다 사측에서는 좋아하고 동료 작가들은 신기해한다. 사측에서는 아무튼 계속 쓰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좋아하는 것 같다. 계속 쓴다는 건 계속 자기 계발을 한다는 거고, 회사로서는 자기 계발을 하는 직원을 선호하기 때문에 내가 작가 생활하는 걸 굳이 막을 이유가 없어진다. 윈윈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 생활을 동료 작가들이 신기해하는 이유가 있다. 직장을 다니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로 살기 결심한 뒤로 가장 어려운 건 생활인 것 같다. 글만 써서 먹고살 수 없으니까. 원고 청탁이 있다고 하더라도 매달 최소 2편의 소설 청탁이 들어와야지 생활이 그나마 유지된다. 문제는 이게 내가 바라는 대로 매달 2편씩 청탁이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작업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니... 글로 먹고 살기 막막하기만 하다. 글을 쓰는 일은 최저임금을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 환경 속에서 발버둥 치는 것과 같다. 매 순간 생존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


그리하여 생업을 고르긴 골랐는데... 고른 직업이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 워라벨 보장도 안 되고, 일이 바쁠 때면 주말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설상가상으로 소설 작업도 잘 안된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애써 여유 있는 척해보지만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공모전 마감은 촉박하고 프로젝트 마감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나만 이렇게 사는 걸까? 다른 '생활문학인'분들은 어떻게 살까. 그들에게 생활이란 무엇이며 생활문학인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작용하고 있을까.



 


그리하여 도착한 세 통의 전화
"생활문학인"

*본 인터뷰는 텍스트 인터뷰로 진행되었습니다.

*본 인터뷰는 인터뷰 비용을 지급하였습니다.

*작가님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인터뷰 내용 무단 복제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전화, 김누누 시인


계피 : 안녕하세요, 작가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누누 : 안녕하세요. 시 쓰고 생활하는 김누누입니다. 시집 <착각물>을 냈고요. 얼마 전에는 두 번째 정규 시집 <일요일은 쉽니다>를 냈습니다. 현재는 월 5,000원에 신작 시를 세 편씩 보내드리는 ‘누누포엣마켓(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68316)’을 하고 있어요. 오천원만 주면 시 보내주는 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농담입니다. 사실 농담 아니에요.




계피 : 제가 유심히 지켜본 결과 김누누 작가님은 평소에 자신을 생활문학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실제로 저도 김누누 작가님께 영향을 받아 저 스스로를 생활문학인이라고 부르고 있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김누누 작가님이 생각하시기에 생활문학인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누누 : 생활을 하고 문학을 하니까 생활 문학인이 맞는 것 같습니다. 모 통신사에서 파견직원으로 일하고 있어요. 인공지능 스피커의 발화를 교정하고 검토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생활로부터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기도 하고요.


결국 생활 앞에 어떤 단어가 붙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활 정체성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고 생각하는데요. 가령 예를 들어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은 결혼이 그 사람의 생활 정체성을 가장 크게 드러내는 요소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건 계속해서 변동되지만요. 우리가 학생일 때는 학교 생활, 군에 있으면 군 생활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요.


문학 생활이라 하면 문학을 하는 생활이 그 사람의 가장 도드라지는 생활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럼 생활 문학은 문학을 하기 위한 생활을 말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전자가 생활을 하기 위한 문학이라면 생활 문학은 문학을 하기 위한 생활인 것 같습니다. 먹고, 마시고, 자고, 웃고, 울고, 때리고 뒹굴고 사막에서 정글에서 울다가 웃다가 하는 그런 모든 생활이 문학을 하기 위한 것인 거죠.




계피 : 생활과 문학의 병행이 어떻게 실현 가능한지, 또 시 분야에서 생활문학인의 전망이 어떻다고 느껴지시나요?


누누 : 생활과 문학의 병행은 아주 쉽습니다. 그냥 살면 됩니다. 살면서 문학을 하면 돼요. 어차피 우리는 생활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살아 움직이며 문학을 하는 한 모두 생활문학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살기 위해 문학을 하면 문학생활인이겠지만요. 이 두 개가 구분이 생각보다 어려울 수 있는데요. 문학을 안 하면 죽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면 문학생활인이고 문학을 안 해도 살 수 있다 생각이 들면 생활문학인 같습니다.


무언가를 쓰는 일을 이어나가려고 지속하려고 돈을 벌고, 밥을 먹고, 건강을 챙기세요. 그럼 생활문학인이 되어 있을 겁니다. 이건 승급이나 진화가 아니고 그냥 그렇게 되는 겁니다. 결혼을 하면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요. 생활문학인은 거창한 개념이 아닙니다. 살면서 글을 쓰면 그걸로 끝이에요. 일을 하면서 밥을 먹고 사랑을 하고 기도를 나누면서 체육 활동을 하면 생활체육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시 분야에서 생활문학인의 전망은 잘 모르겠습니다. 시 분야가 뭘까요? 저는 이것에 대해 말할 만큼 시 분야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저는 제 얘기만 할 수 있어요. 그럼 저를 시 분야라 생각하고 말해보겠습니다. 전망이 밝진 않으나 때려치울 수준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질문(시 분야에서 생활문학인의 전망)이 '시를 써서 먹고살 수 있을까요?'라는 의미라면 수지타산이 안 맞습니다. 시장이 너무 작아요. 어쨌든 해 먹으려는 사람이 있으니 시장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근데 또 이득을 보기에는 너무 돈이 없어요. 그렇다고 제가 굶는 건 아닙니다. 저는 따로 돈을 버니까요. 어버이날에 부모님 데리고 코스요리 먹을 정도는 있습니다.


음 생활문학에 대해 또 생각을 해봅시다. 생활과 문학. 사실 이 둘은 따로 떼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자연인으로 돌아간다 해도 우리는 자연인으로 생활하는 겁니다. 생활 없이 문학을 하려면 좀비가 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계피 : 생활과 문학이 공존하기 위해서 어떤 제도나 장치 등이 필요하다고 여기시나요?


누누 : 문학을 하며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려면 어떤 제도나 장치가 필요하냐고 묻는 질문으로 이해하고 답변하겠습니다. 시장이 커져야 합니다. 일단 원고료 수지타산이 맞아야 뭘 할 것 같아요. 근데 또 그렇다고 돈이 벌리는 것도 아닙니다. 일이 없거든요. 지면보다 시인이 많은 것이라 생각되는데 이 사람들한테 한 편에 200만원 주고 매달 청탁 주는 거 아닌 이상 모두가 문학으로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시장이 그렇겠지요. 연예인도 돈을 버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하니까요.


어떤 제도나 장치가 생기면 될까요? 시를 한 편 쓰고 저장 버튼을 누르는 순간 <정말 저장하시겠습니까? 이걸로 시 한 편 완성입니까?>라는 메시지가 뜨고 거기에 ‘예’라고 하면 알아서 통장에 얼마간 돈이 들어오는 장치가 생기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분기에 혹은 반기에 한번 지원금 얼마 준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요. 시집을 사는 사람이 많아지면 될 것도 같습니다. 시집을 어떻게 팔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제 시집도 잘 안 팔려서…


저는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앞으로 시 시장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시를 안 읽으면 시가 없어질까요? 시 써서 돈 버는 사람은 없어질지도 모르겠네요. 지금도 좀 그런 것 같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더 많은 지원금, 더 많은 지면보다 창작자 각자 각자가 자기 나름의 작품을 발표하고 독자에게 판매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누누포엣마켓’이 그런 역할을 하겠네요. 실제로 청탁이 없어서 만든 것이기도 합니다. 저도 신작 시 발표는 해야죠. 저 서른두 살이에요. 유노? 그럼 신작 시 발표해야죠.


그렇게 해서 다들 자기 나름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서 소위 말하는 청탁이 없어도, 지원금이 없어도 아쉽지 않은 상태가 되면 또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지면도 숨통이 트이고 지원금도 숨통이 트이겠죠. 물론 저도 이걸로 경제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셔츠 한 장 정도 살 수 있는 만큼 벌어요(어떤 브랜드의 셔츠인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창작자(저 같은 경우는 시인)들이 갖고 있는 플랫폼인지 어쩌고인지를 잘 정리해서 독자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게 정리해놓는 장치가 있다면 좋겠네요. 그래 봤자 한 줌 단일 텐데 무슨 의미가 있냐 싶을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사실 그래요. 그래도 그냥 하는 거죠. 생활문학이란 건 그런 겁니다. 지속하기 위해서 일단 하는 거. 시를 쓰려고 직장에 다니는 거. 지원 사업을 노리는 거. 돈을 벌어 책을 만드는 거. 그런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뭐가 돼도 되겠죠. 미래가 밝은지 어두운지는 모르겠습니다. 별로 관심도 없어요. 다 해서 끝까지 와봤는데 어둠뿐이면


만약 정말 그렇다면

그래도 이미 끝난 건데 뭐 어떻습니까.







두 번째 전화, 최예은 소설가


계피 : 안녕하세요, 작가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예은 : 안녕하세요! 평소에는 방송국 PD로 일하고 있지만 [어느 방송국인지는... 비밀^^] 그 보다 살짝 더 전부터 (아마... 제가 대학생 때부터...?)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최예은이라고 합니다. 학생으로서, 사회인으로서, 20대 청년 여성으로서, 그리고 그 이전에 저라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겪은 일들을 약간의 허구를 섞어 써 내려가 보니 남들이 말하는 '소설'이라는 것을 좀 많이 쓰게 된 것 같아요. 그렇게 몇 년간 틈틈이 집필한 소설들을 모아 최근에는 소설집 <스물 네 자 진심, 일곱 갈래 인연>을 출간했습니다. 알라딘을 비롯한 다양한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계피 : 제가 유심히 지켜본 결과 최예은 작가님은 문학을 지속하기 위해 직업을 가지고 생활을 해 나가시는 것 같아요. 그런 맥락에서 저는 작가님이 생활문학인이라고 생각했고, 은근슬쩍 생활문학인 인터뷰를 부탁드렸습니다. 작가님이 생각하시기에 생활문학인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예은 : 조금 전 자기소개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방송국에서 PD로 일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대학 시절부터 꿈꿔 왔던 진로였고 전공과도 들어맞지만, 막상 이 모든 일이 실제로 제 삶에 들이닥치게 되면서 그쪽으로 꿈만 꾸었던 시절의 제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과의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더라고요. (예를 들어 휴일이 불규칙하던지, 야근을 밥 먹듯이 하거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과 불가피하게 같이 일하게 된다던지...)


어떻게 보면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다 보니까 '직장인'이라는 가면을 벗은 '인간 최예은'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나라는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고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릴 때도 생긴 것 같아요.      


이런 저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써야 하는 여러 가면을 벗어던진 날것, 가장 순수한 '인간'으로서의 제가 누군지 계속 상기시키며 기억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본업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는 다른 많은 예술인들 중에서는 저와 다른 의견을 가진 분들도 많겠지만요... 개인적으로 '생활문학인'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듭니다. 그러한 저의 태도를 잘 대변할 만한 어휘인 것 같아서요!!     




계피 : 생활과 문학의 병행이 어떻게 실현 가능한지, 또 소설 분야에서 생활문학인의 전망이 어떻다고 느껴지시나요?


예은 : 조금 전 말씀드린 저의 본업은... 아무래도 일하는 동안에 업무적인 부분 외적인 생각에 집중하는 것이 어려운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러한 점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소위 말하는 '워커홀릭'과는 180도로 다른 유형의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잠시 그런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있더라고요.      


그렇게 되니까 하루하루를 살아가며―일할 때나 사회생활을 하며 느끼는 상념뿐만이 아니라 친구를 만나거나, 가족과 대화를 하거나, 하다못해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가거나 길든 짧든 다른 누군가를 만나 친구 내지는 친구 이상의 관계를 맞을 때―매 순간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들을 잘 떠올리고 있다가 글로 적으면 이게 나중에 저에게 심적인 여유가 생겼을 때 또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는 힘이 되더라고요.      


한편으로는 어떠한 관점을 글로 표현하면서, 특히 그중에서도 소설을 쓰는 점에 있어서 저에게는 생활하면서 느꼈던 감정에 너무 깊게 빠져 들지 않고 한 뼘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세상 어딘가에는 저와 비슷한 일을 겪고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비슷하게 영향을 받을 사람이 있을 거고, 저는 그저 어딘가에 존재할 그 사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는 마음으로 소설을 쓴다고 생각하면 그게 또 나름대로 동기부여가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껏 제가 썼던 소설들은 대체로 어떠한 측면에서 제가 실제로 삶을 살아가면서 겪었던 일,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투영한 부분이 작게나마 존재하는 편이에요. 앞으로의 제 삶에서도 지금껏 겪어 온 만큼 많은 변화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고, 그때마다 느끼는 새로운 감정을 저는 계속 글로 쓰면서, 정말로 세상 어딘가에서 저와 비슷한 일을 겪으며 비슷한 감정을 느낄 법한 인물들과 그들이 펼치는 이야기를 계속 머릿속에 떠올릴 거예요(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사실 스포츠 방송국을 배경으로, 그곳에서 일하는 PD를 주요 인물로 세운 연작 소설을 집필할 계획이 있어요. 아마 이것도 그 모든 삶과 감정의 파편을 한 뼘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쓸 수 있게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전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습니다.




계피 : 생활과 문학의 병행이 어떻게 실현 가능한지, 또 소설 분야에서 생활문학인의 전망이 어떻다고 느껴지시나요?


예은 : 전반적으로 본업과 작가로서의 작품 활동 모두 좋아하는 일이기에 저의 꿈을 하나하나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여 만족하는 편이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진정으로 원하고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일은 둘 중에 어떤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솔직히 '내 소설이 유명해지면 그때부터는 직장을 그만두고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싶다'는 생각도... 한 번쯤 해 본 적 있어요ㅎㅎ)


저라는 사람이 원체 흥미가 생기다 보면 이것저것 많은 것을 시도해 보는 편이라 (21년 여름부터는 심지어 유튜브도 시작했습니다! 채널명은 '달토끼쿵야(https://www.youtube.com/channel/UCXQ86FN6AeqAASneZE9QDFA)'고 그야말로 제가 하고 싶은 이것저것을 올려요!)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며 설정을 간단하게 적어 놓거나 도입부를 써 내려간 소설들도 많지만, 본업이라던지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일들로 마무리 짓지 못한 부분이 있어 그 점이 아쉬울 때도 있고요. 그래도 우리의 삶은 길고, 그만큼 수많은 미완의 작품을 완성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며 조급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일들은 결국 시간이 해결책이 되어 이전의 제가 몰랐던 여러 가지 진리들을 알려주고 그게 제가 써 내려갈 이야기의 큰 핵심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결론적으로는 '생활과 문학을 병행한다'는 점이 현실적으로는 버겁고 힘들 수 있겠지만, 우리가 본업에서 매번 성과를 이뤄야 한다는 부담감에 놓이듯 꼭 매번 글을 써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지만 않는다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우리의 경험이 결국 우리가 써내려 갈 글의 힘이 되고, 원동력이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본업 외에도 하고 싶을 일을 찾아 그 안에서 취미 활동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고, 저도 결국 그중에 하나인 것이잖아요. 우리네 삶의 모든 순간, 모든 감정이 우리에게 영감이 되어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자양분이 된다면, 어떤 것보다도 최상의 결과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모든 '생활문학인'들 화이팅!







세 번째 전화, 예미 음악 평론가


계피 : 안녕하세요, 작가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예미 : 안녕하세요. 현재 대중음악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예미입니다. 저는 현재 웹진 <아이돌로지>(https://idology.kr)를 중심으로 음악 평론 글을 올리고 있고, ‘Various Critics’ 등 여러 가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민음사 ‘한편’에 본명으로 글을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네이버 블로그(https://blog.naver.com/sjctk)브런치(https://brunch.co.kr/@yemi-999) 등지에서 독자 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계피 : 제가 유심히 관찰한 결과 예미 작가님은 생활과 음악평론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시려고 노력하시는 것 같습니다. 말씀 주신 것처럼 가족을 돕고 또 경제적인 생활에서도 안정을 추구하시려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가 슬쩍 생활문학인 인터뷰를 부탁드렸는데요. 생활문학인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예미 : 저에게 ‘생활문학인’은 창작이나 평론 등의 영역에서 글이나 말 등으로 꾸준히 결과물을 만들고 관련 영역에서 활동하며, 글과 무관한 다른 분야의 직업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제 글이나 활동이 사전적 의미로 ‘문학’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몸담고 있는 평론 관련 영역을 ‘문학’으로, 그와 무관한 생업이나 일상을 ‘생활’이라고 통칭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저는 얼마 전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며, 집안일과 가족들의 가게 일을 도와 드리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개발자 취업에 관심이 있어서 관련된 기술 교육 코스에 들어가려고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평론 활동은 일상생활 사이 짬을 내어 진행하고 있습니다. 시기에 따라 ‘문학’과 ‘생활’ 중 중요한 것이 달라지는데, 지금은 직업인으로 자리 잡아 ‘생활’을 잘 세우는 것을 ‘문학’보다 좀 더 우선하고 있습니다.




계피 : 생활과 문학의 병행이 어떻게 실현 가능한지, 또 음악 평론 분야에서 생활문학인의 전망이 어떻다고 느껴지시나요?


예미 : 대중음악 평론 부문에서 ‘생활문학인’은 전망을 따지기 이전에 이미 주된 존재 방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주변 대중음악 평론가들은 주로 대중음악 전문 웹진에 글을 올리며 활동하는데, 이들 웹진은 수익 사업이 아니라서 대부분 무보수로 운영되니 평론가 절대 다수가 음악과 무관한 생업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러한 현실을 보며 생활문학인의 진로를 택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제가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할 때쯤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직업을 갖고 활동하는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서, 진로 선택에 큰 거부감은 느끼지 않았습니다. 저는 음악 글쓰기와 생활을 병행하면서 다양한 경험으로 삶을 밀도 있게 채우고, 의미 있는 인간관계를 맺으며 성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활을 병행하다 보니 현상 유지 이상의 규모 있는 기획을 추진하기 어렵지만, 평론을 통해 다른 생활에서 얻지 못한 기쁨을 얻었기 때문에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려고 합니다.




계피 : 생활과 문학이 공존하기 위해서 어떤 제도나 장치 등이 필요하다고 여기시나요?


예미 : 우선, 초과근무나 회식이 줄어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가지 일을 병행할 수 있을 만큼의 정신적, 시간적 여력이 생겨야 생활과 문학의 공존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생활이 바빠 평론 관련 활동을 줄이시는 분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동료 필자 분들을 오래 볼 수 있도록 ‘워라밸’이 사회적으로 더 잘 지켜졌으면 좋겠습니다.


보다 많은 필자에게 돈을 받고 하는 일감이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대중음악 평론가에게 일감을 주는 곳은 일반 언론사나 출판사 등 음악이 주가 아닌 매체가 대부분인데, 이들 매체와 일하는 평론가는 전체 평론가 중 주목받는 일부만 해당됩니다. 이 매체들이 음악 평론 관련 이야기를 필요로 할 때 찾는 평론가의 범위가 지금보다 넓어졌으면 좋겠습니다.세부 주제나 독자의 성향에 따라 더 다양하고 세밀한 견해를 매체에서 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감이 늘어나면서 저를 포함한 평론가들에게 더 큰 동기 부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나는 "문학을 하는 행위가 노동의 행위가 될 수 있는가"하는 의문이 또다시 들었다.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된 건 사실 꽤 됐다. 삶을 연속하기 위해서는 김누누 작가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생활을 그냥 잘 살아내야 하는데 그것은 결국 돈이 없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삶이란.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문학은 돈이 되지 않는다. 시와 소설, 비평이나 평론은 들이는 품에 비해 임금이 정당하게 산출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인은 문학이 아닌 것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벌려면 노동을 해야 하고 노동을 하려면 하루의 일정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하루의 시간을 할애하는 일은 시와 소설을, 그리고 평론과 비평을 쓸 시간을 줄이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직업을 구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놓이게 되고 필연적으로 직업을 선택하기를 강요받는다. 문학은 돈이 되지 않는다. 문학은 문학을 쓰는 사람의 삶을 결코 구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엉망으로 만든다는 게 내 생각이다. 더 엉망으로 만들지만, 그렇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도록 만든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더 단단하고 안전하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지 생활과 문학이 지속될 수 있을까?


프로 N잡러의 시대, 문학인의 생존.

이제는 함께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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