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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계피 May 22. 2022

문학은 노동이 될 수 있는가

작가인데 작가가 아니고 작가라서 작가인 삶

생각했던 것보다 생활문학인이라는 키워드에 대해서 반응이 좋아서 놀라고 있다. 돌이켜보면 '작가'들의 생활이라는 것이 신비롭다는 환상, 이 환상으로 인해 글이라는 것이 써지는 과정은 잘 보이지 않고 늘 결과물만 뚝딱 내놓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은 아닐까. 이런 환상은 우리 사회 곳곳에 있다. 궁금하면 이력서에 시인, 소설가, 수필가, 비평가, 평론가 등의 문학작가라는 타이틀을 달아보자. 그렇다면 면접관이 당신에게 물을 것이다.


"작가라고 해서 늘 틀어 박혀서 글만 쓰는 건 아니죠?"


예, 아닙니다. 그렇게 답해도 면접관은 당신에게 가지고 있는 편견을 쉽게 지우지 못할 것이다. 생활문학인들의 가장 큰 난제는 커리어가 작가라는 것인데 작가라는 것을 말하면 작가라는 이미지와 환상에 허우적거리게 된다는 것 아닐까 싶다. 사실 작가 활동을 하고 있는 게 크게 가산점이 되지는 않지만 작가라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나의 이력서 상의 공백을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기에 나를 스토리텔링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작가라는 키워드가 들어가게 되는 것 같다.


앞서 몇 번 언급했지만 나의 사회적인 직업은 작가다. 기획도 하지만, 물론 프로필에는 기획자라고 적어 놓았지만. 아무튼 나는 주임, 대리 이런 직책 말고 작가라는 직책으로 불리고 있다. 주임이라고 불렸던 때도 있는데 솔직히 좀 부담스러웠다. 적은 연봉으로 나의 석사라는 타이틀이 가지고 싶어서 나를 뽑아 놓고서 주임은 무슨 주임이야. 그런데 왜 문학 작가는 문학 작가로만 살아갈 수 없나요?





문학은 노동이 될 수 있는가.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서 진행한 본 투표에는 총 119명이 참여해주셨다. 그중 105명인 88.23%가 문학은 노동이 될 수 있다고 답변해 주셨고, 14명인 11.76%가 문학은 노동이 될 수 없다고 대답해 주셨다.

문학은 노동이 될 수 있는가, 투표 진행 결과

119명이 참여해주셨지만 예술계 종사자이나 예술인들이 많이 참여한 투표이기 때문에 이번 투표 결과가 "문학은 노동이 될 수 있다"는 쪽으로 결과가 기울어져서 나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결과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는 문학을 노동으로 보지 않는 시각이 많았다. 문학 노동의 보수라는 것은 하나의 작품을 쓰기 위해서 필요한 '노동력'에 대한 보상이라기보다는 결과물로서의 '작품'에 대한 보수의 성격이 크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가령 소설 1편, 200매 원고지 100매, 매수 당 1만 원의 청탁을 받은 상황이라고 가정해 보자. 소설 1편을 완성하기 위해서 당신은 카페에 가서 커피도 마실 거고, 필요한 자료조사를 위해서 책도 읽고 인터넷도 뒤질 것이다. 필요하면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하거나, 특정 지역을 더 알기 위해 현장 조사를 떠나야 할 수 있다. 이런 모든 비용은 작가가 부담해야 한다.


커피 한 잔 값까지 계산하자니, 좀 웃건 것 아닙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 또 생각해보자. 급여에는 식대라는 것이 있다. 회사는 당신이 기본적으로 먹고 살 권리를 보장해 준다. 당신의 업무스킬, 영업방식 등을 모두 포괄해서 노동력으로 산출하고 그에 따른 연봉을 제시한다. 하지만 문학은, 결과물인 작품의 원고지 결과물만을 가지고서 고료를 산출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받는 월급의 개념에는 당신의 생활을 고려한 각종 개념들이 복합돼 있지만 문학의 고료라는 것은 당신의 생활을 고려하는 개념이 배제돼 있다.


작품을 한 달 안에 써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3개월은 필요하다. 초고를 완성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줘서 아름아름 피드백을 받아 수정하고, 또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드러내고 탈고하고의 반복을 하다 보면 3개월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문학 청탁이라는 것은 이런 노동력을 지워버리고 오로지 200매 원고지 기준의 작품의 결과만 가지고 값을 산출해낸다. 100만 원, 세금 떼면 98만 원 즈음될까. 당신의 3개월 노동이 고작 98만 원으로 환산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문학은 노동이 될 수 있다고 투표했는지, 아마도 당신은 궁금할 것이다.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약칭: 예술인권리보장법)에서 제10조(예술인의 직업적 권리 등)를 보면 "① 예술인은 예술 활동과 그 성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누릴 권리가 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우선 제10조의 명칭 자체에 '직업'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예술인을 직업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 권리를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글에서 김누누 시인이 "시를 한 편 쓰고 저장 버튼을 누르는 순간 <정말 저장하시겠습니까? 이걸로 시 한 편 완성입니까?>라는 메시지가 뜨고 거기에 '예'라고 하면 알아서 통장에 얼마간 돈이 들어오는 장치"가 있으면 문학이 생활적인 직업으로서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렇다. 여기서 문학이 노동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지면 발표를 하지 않으면 나의 문학은 값조차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디에도 발표된 적도 없고 누구 하나 원하지 않아서 아무에게도 읽힌 적이 없는 것들, 그렇다고 출간되고 인쇄된 것에 비해 딱히 덜 노력했다거나 시간을 덜 들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임현, "예술이냐, 산업이냐", 계간 자음과 모음 2020년 봄호(통권 44호) p.90


문학은 취미의 영역이기 때문에 노동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그렇다면, 좋은 글을 쓰면 돈을 더 주고 나쁜 글을 쓰면 돈을 덜 주나? 좋은 글과 나쁜 글의 차이는 누가 결정하는 걸까? 문학이 정말로 취미의 영역이라면 왜 법률로써 예술인의 정의를 시도하고 예술인의 삶에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으며, 예술인 긴급 융자 대출이나 예술인 어쩌구 하는 제도가 있는 걸까.


모든 예술인이 모두 생활적인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예술이 생활이 되고 직업이 되면 안 되는 걸까? 설령 진짜로 취미라고 하면 망하면 안 되나? 여러분은 직장 생활에서 매일매일 뿌듯하고 실수 안 하고 안 망하면 사시나요? 저는 직장 생활에서 매일매일 망하고 있는데 저만 이렇게 사는 건가요? 뭐, 저만 그렇다며 어쩔 수 없긴 한데, 왜 문학인은 매일매일 성공하는 갓반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요를 받는 걸까요.



소설이 엉망이라  된다는 겁니까? 그게 어떻게  잘못이에요? 말했잖아요. 시간이 필요하다니까. 그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니까. 소설  쓰겠다고  버는 일을 모두    없는  아니겠습니까. 누가 나를 책임져주는 것도 아닌데. 당신들이 매번 나한테 청탁할  아니잖아요. 원고료로  200 원씩  것도 아니잖아요. 그것만 보고 지속 가능한  수업을 불성실하게 운영할 수는 없는  아닙니까.
임현, "예술이냐, 산업이냐", 계간 자음과 모음 2020 봄호(통권 44) p.93


그렇다고 발표된 것들이, 솔직히 돈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얼마나 돈이 안 되느냐고? 그것은 내가 말하는 것보다 장은정 비평가의 글을 가지고 오는 것이 더 명징하게 설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은정 비평가는 계간 자음과 모음 2020년 봄호에서 "지나간 미래"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문학이 얼마나 노동이 되지 않는지, 또 이런 관행들이 얼마나 잘 못 됐는지,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담아 10년 후의 독자들에게 글을 쓴 바가 있다.


2009년부터 2019년까지 176편의 비평을 발표한 대가로 원고로 3,390만 원을 벌었고 그 이외의 활동비로 210만 원, 2017년에 제62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여 상금으로 1,000만 원을 받았으며, 같은 해 대산창작기금을 수상하여 1,000만 원, 등단 당시 받은 상금 500만 원까지 모두 합치면 총 6,100만 원이 되는군요. 계산해보니 11년간 월평균 46만 원을 벌었습니다.
장은정, "지나간 미래", 계간 자음과 모음 2020년 봄호(통권 44호), p.56


소설은 더 많이 받지 않나요? 물론 소설은 여타의 장르에 비해서 고료를 많이 받는다. 하지만 많이라는 것의 개념이 상대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상대적이라는 것은 절대적이라는 말이 아니고, 그렇다면 이것은 많다에 속하지 못하는 개념이 될 수도 있다. 문학의 고료는 많지 않다. 문예지를 운영하는 출판사의 "사정"에 따라서 적게는 원고지 매당 4,500원, 많게는 13,000원까지 받아봤다. 사실 이렇게 내가 얼마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공공연하게 비밀인데, 뭐.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이 다들 비밀을 척척 지켜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여 저는 크게 괘념치 않습니다. 우리들만의 비밀로. 최저 시급은 오르기라도 하지, 문학의 고료는 유구하게 오르지 않고 있다.


내 글로 생긴 맨 처음 돈은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상금이었다. 1984년 1월, 50만 원. 당선의 기쁨을 한층 오붓하게 했지. 신춘문예 제도가 생긴 초창기에는 소설 부문 상금으로 작은 집 한 채를 사기도 했다는데, 글쎄 1984년 50만 원으로는 허름한 방 월세 보증금쯤은 됐을 테다.
황인숙, "전업 작가로 산다는 것", 계간 자음과 모음 2020년 봄호(통권 44호), p.75


아니, 선생님. 앞에서 장은정 선생님은 1,000만 원을 받으셨고 황인숙 선생님은 50만 원을 받으셨으면 물가 반영해서 충분히 오른 것 같은데요? 이런 생각이 든다면 신춘문예와 출판사의 차이에 대해서부터 설명해야 하는데. 그냥 간결하게 정리하면 신문사는 돈이 없어서 요즘 신춘문예 당선금으로 몇 백. 만 원 정도를 주고 출판사는 돈이 좀 있는 곳은 1000만 원을 주는 곳도 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귀찮기 때문에 하지 않겠습니다.


  양보해서 모든 곳에서 1,000 원을 준다고 해보자.  돈으로 보증금 내기도 힘들다. 옛날에는 "50 원으로 허름한  월세 보증금쯤은 (황인숙, 같은 글)"지만 요즘에는 1,000 원으로 서울에서 반지하 월세방이라도 구할  있으면 다행이다. 거기다가 1년에 1,000  큰돈이 아니다. 물론 여러  언급했듯이 당신이 프로 N잡러라고 한다면 1,000 원은 당신의 생계에 소소하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문학에서의 값이라는 것이 물가의 변화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문학인들의 생활은 점차적으로 어려워지고 있다. 생활의 안정? 그것을 원하면 생활문학인이 되는 수밖에 없다.


생활문학인이 된 당신, 생활문학인이라서 인생이 평탄할 것인가? 아니다. 안타깝게도 평일 저녁, 주말 할 것 없이 회사에서는 당신을 괴롭힐 것이고 문학도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 강의라도 생겨 봐, 그러면 당신은 숨만 쉬고 있는데도 프로 3잡러가 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그렇다. 그냥 숨만 쉬고 있는데 5잡러는 되는 것 같다.


사실 이 글도 며칠 내내 각 잡고 쓰고 싶었는데 시간에 쫓겨 일요일 오후 2시부터 쓰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마감에 쫓기는 유형의 사람이 아닌데, 나는 마감 미리 해놓고 인생을 여유롭게 즐기는 타입의 인간인데 어쩌다가... 뭐, 다 생활과 문학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이기호 소설가의 단편 소설책 제목 변용),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학은 노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문학은 노동이 되어야만 한다.


모두가 전업 작가가 될 수 없다는 냉엄한 자본주의의 목소리 속에서도 나는 모두가 전업 작가가 되는 삶을 꿈꾼다. 이 꿈은 그냥 대충 놀고먹으면서 살겠습니다, 하는 생각이 아니라 모두의 작품 활동이 그만큼 존중받기를 희망하는 목소리다. 문학만으로도 삶이 이어지는 것, 그리하여 문학인이 문학에 전념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나의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썼는데 아무도 안 읽어준다고 취미라고 하면 나는 또 할 말이 없다. 취미가 나쁜 건 아니잖아요. 문학하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독자를 모아야 한다, 맞는 말이다. 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되면 돈이 안 돼서 생활이 안된다. 후원 계좌를 열어 둔다고 해도 그것이 생활이 가능할 만큼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면에만 목숨을 거는 건 답이 아니다.


한 때 유행했던 메일링 시스템도 이제는 독자도 모이지 않고 돈이 되기 위해서는 기획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기획하는 일을 정말 좋아하긴 하지만, 모든 문학인이 기획자일 수는 없다. 이건 또 문학인에게 생활인으로서의 프로 N잡러를 요구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우리의 작품 활동이 생활을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 판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대학원에서 아등바등 이 악 물면서 교수가 운 좋게 되기를 희망하는 수 밖에는 없는데, 정말로 운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운이 나빠 시스템에서 튕겨져 나와 사회로 왔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로 거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인생은 누가 담보해 주나요? 이 삶이 유구하게 이어질 수 있도록 누가 저의 안녕을 빌어주고 책임져 줄까요. 오늘은 볕이 좋아서 커피를 한 잔 하며 글을 쓰고 싶은데, 그런 생활을 언제 가지 외면할 수 있을까요. 성공한 작가가 되면 괜찮을 거라고들 말하는 목소리를 알고 있습니다만, 성공한 작가가 되기가 어디 쉬운 가요.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삶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한 종류의 것인가요? 한 번의 성공이 영원히 내 인생을 책임져 주는 것도 아니고... 문학이 무슨 로또입니까. 성공한 작가가 되면, 이라는 말로 우리는 언제까지 문학이 노동이 아니라는 환상 속에서 례술을 추구해야 하는 걸까요.


가수 이랑은 팔아버릴 트로피라도 있지, 문학은 팔아 치울 것도 없습니다. 아, 유명해지면 트로피 정도는 줄 테니까 그날이 오면 저도 트로피를 팔아 한 달 방세를 마련하면 되는 걸까요? 그런데 그 트로피는 누가 사줄까요. 트로피 장사를 하는 저를 귀엽게 여기는 선배 문학 작가가 사주시겠죠? 그 사람은 분명히 나보다 더 유명하고 전업 작가로서 생활도 안정돼 있고 돈도 잘 버니까, 운이 좋으면 미래의 선배님이 돈만 주면서 상패는 안 받겠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그럼 그분을 그 달의 은사님으로 삼으면 되는 거겠죠?


문학은 노동이 될 수 있는가, 당신의 의견이 문득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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