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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구차 Nov 12. 2024

‘죄송합니다’는 말에는 얼마만큼의 죄송함이 들어있을까

출근길 버스에서였다. 만원 버스라 마지막에 내리려는 승객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채 문이 닫히려고 하고 있었다. 내려야 하는 그는 ‘죄송한데, 기사님, 내릴게요! 죄송합니다!‘ 문이 다시 열렸고, 다시 한번 그가 ’죄송합니다!‘를 외치고 내렸다. 순식간에 죄송합니다, 가 세 번이나 외쳐졌다. 내려야 할 사람이 잘 내렸고, 버스는 많이 지연되지 않고 잘 출발했는데,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죄송해야 할 일인가. 승객이 요금을 내고 승차하고 하차하는데, 이렇게까지 죄송하면서 내려야 하는가.


언젠가 직장인이 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팀 내 선배는 물론, 다른 부서의 모든 이가 나보다 한참은 까마득해 보이던 시절이었다. 내가 하는 경영관리기획업무의 특성상 많은 숫자를 집계분석하고 보고서를 쓰는데, 이때 단지 숫자로만 탁상공론하지 않기 위해서 각종 분석보고 시에는 현업의 많은 이들에게 전화를 하고, 미팅을 하고 찾아가곤 한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담당한 채널의 영업담당자에게 왜 전월보다 잘 나왔는지 못 나왔는지 해당 채널의 특수한 이슈가 있는지 등을 전화로 한참을 물었다.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그가 말했다. “그런데요, OO님. OO님도 본인이 맡은 일을 하는 건데, 매번 죄송한데 시간 내줄 수 있냐, 죄송한데 물어봐도 되냐... 이렇게까지 죄송해하지 않아도 돼요. 죄송하다는 예전에 죽을죄를 진 죄인이 쓰던 단어래요. 근데 OO님이 죽을죄를 진 게 아니잖아요. 물어보시는 거 귀찮긴 한데, 죄송까지는 안 해도 돼요.”


나의 죄송함과 버스를 내린 이의 죄송함에는 얼마만큼의 죄송함이 들어있을까. 그와 나 모두 사과를 하려고 한 건 아닌 듯하다. 그는 잠시만요 대신 죄송합니다를, 나는 나의 쑥스러움이나 민망함을 죄송합니다, 로 가리려 했던 것 같다. 버스의 그는 적당한 양해, 나는 시간을 뺐은데 대한 정중한 양해정도면 되지 죽을죄를 진 죄인이 될 필요는 없었다. 그건 우리가 쓰는 죄송함이 더 이상 진정한 의미의 사과나 미안함이 들어간 단어가 아닌, 일종의 관용어구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일본어의 ‘스미마셍’ 같은 거다. (일본어의 스미마셍은 미안합니다로도, 실례합니다로도, 고맙습니다로도, 쓸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인이 정말로 미안하고 사과를 해야 할 때는 스미마셍을 쓰지 않는다.)


작금의 높으신 분의 사과와 죄송이 이슈가 된 바가 있다. 그분의 사과방식은 매우 기괴하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다’는 표현을 써서, 죄송한 당신은 어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유체이탈을 하고 그 당신조차도 제삼자가 되어 죄송하다고 말하는 당신을 보며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자신을 해설하는 표현을 쓴다.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겠다’와 같은 방식으로 내 발언과 행동에는 잘못은 없지만, 굳이 굳이 네가 내 사과를 받아야만 마음이 풀린다면, 내가 옜다! 선심 쓰듯 사과 줄게, 죄송 줄게 하는 식이다. 무엇에 대해 사과하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하여튼 죄송하다‘는 표현도 많이 쓴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의 해설은 관두겠다.) 사실 그는 여러 차례 사과방식과 태도에 대해 볼멘소리를 들은 바 있으나, 그는 그 소리를 드지 못했거나 무시하는 것 같다. 그의 죄송에는 버스 내릴게요 같은 약간의 양해정도가 들어있는 건 아닐까,는 생각을 했다. 아니 버스를 내린 이가 품었던 약간의 양해를 구하는 마음정도라도 그의 사과와 죄송에 담겨있긴 했을까. 최소한 버스를 내리려던, 영업담당자에게 질문하던 나의 절박함은 빠져있는 것 같다.


우리가 평소에 쓰고 있는 죄송과 사과에는 얼마만큼의 진정성이 남아있을까. 이제 어딘가 진심 어린 죄송과 사과가 남아있긴 할까. 정말 죄송해야 할 때는 어떤 표현을 써야 할까. 죽을죄를 진 사람이 쓸 수 있는 다른 표현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어떤 상황에서도 약간의 양해를 구하듯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거나, 기분이 나쁘다면 사과를 하는 조건부 죄송을 내걸고는 껍데기만 남은 ‘스미마셍’을 되풀이할 수 있다. 마음을 담은 죄송과 진정성 어린 사과의 태도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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