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게 해내지 않을 거면 곧잘 중도포기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예를 들어 영어학원 10강을 들어야 하는데, 첫 번째, 두 번째 잘 가다가 세 번째에 못 가거나 안 가게 된 상황이 발생하면 그대로 내리 나머지 강의도 안 들어버리는 식이었다. 이미 백 프로 달성은 요원해졌으니, 그냥 안 해버리는 것이다.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한 번을 안 가더라도 나머지를 모두 수강했다면 90프로를 출석한 건데 말이다. 그리고 수강을 한다는 것이 완벽을 의미한 것도 아니었는데, 참 이상한 생각이었다. 대학교를 다닐 때 이 성향이 극에 달했던 것 같다. 성적도 그래서 들쭉날쭉 했다. 잘하고 좋아하는 건 완벽히 하니 당연히 에이플러스였고, 아닌 과목은 영어학원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다행스럽게도 전공을 좋아했기에 어찌어찌 평균적인 학점으로 졸업은 했다. 졸업을 하고 한참이 흘러 이런 성향을 어디선가 ‘게으른 완벽주의’라 칭한 걸 보고는, 무릎을 쳤다. 완벽하고 싶으나 어떤 의미로 게을러서 지속성이 떨어지고, 이에 다시 실망하고, 멘탈적으로도 힘드니 뭔가를 지속할 힘이 다시 나지 않고,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성향이 이상했던, 그리고 이상한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면, 먼저 삶의 많은 부분을 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을 했다는 것이다. 대학교 시절에 이게 극에 달했던 것 보면, 주로 공부만 하도록 전 우주가 나를 돕던 중고생시절을 지나면서 큰 굴곡이 없는 삶을 거쳐오다 보니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다. 아까의 영어학원 사태만 해도 극심한 감기몸살이라던지, 집에 큰 경조사가 있다던지 하는 부득이한 상황들이 생길 수 있는데, 이런 외부요인마저도 나의 노력이나 의지의 영역으로 생각하고 이를 통제만 하려 했던 것 같다. 또 이상한 건 완벽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거다. 백 프로 영어학원을 가는 것만이 완벽한 것일까. 한, 두 번 빠지더라도 이를 보강이든, 자료든 스스로 채워서 실제 영어실력을 이전보다 키우는 게 완벽일 수도 있지 않을까. 후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도 않았던 것 같고(그랬더라도 전자인, ‘학원 백 프로 출석’ 같은 것에 너무 매몰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세운 이상한 완벽한 기준에 스스로 빠져 허우적댔던 것 같다. 심각한 자가당착이었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건 완벽한 한 번보다, 불완전한 여러 번이 더 가치 있었다는 건데, 그걸 몰랐다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야 매일같이 끄덕인다. 90점, 100점짜리를 한 번 하는 것보다, 여러 가지 상황들로 조금 서툴고 어설픈 시작을 할지언정 60점, 70점짜리라도 5번을 하는 게 훨씬 낫다는 걸. (단순 산수를 해봐도 100점과 70점*5=350점과는 큰 차이가 난다!) 그런데 나는 그 시절 1번의 100점을 만들기 위해서만 노력했던 것 같다. 남은 시간, 이게 되지 않는 것에, 내 의지가 불충분함에 한탄하고 실망하기만 하면서.
이 성향을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이 고쳤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잘하더라도 통제되지 않는 외부요인들이 더 많은 것이 일이란 것이었다. (물론 그런 것 때문에 초기에는 많이 힘들었다.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완벽의 기준도 얼마나 상대적인지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몸으로 배웠다. (신입시절 썼던 내 기준의 ‘완벽한‘ 보고서는, 선배들이 보았을 때 얼마나 ’불완전‘ 했을까.) 결국 그 완벽에 다다르기 위한 수없는 불완전한 반복만이 결국 애초에 도달하려고 했던 완벽주의 비스무리한 것이라는 것을 늦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나는 몸이 뻣뻣한 편이라, 살면서 한 번도 선 채로 허리와 몸을 굽혀 바닥에 손이 닿아본 적이 없었다.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요 몇 달, 이게 되겠어?라는 마음으로 허공에서 손을 계속 뻗었다. 계속해서 손끝조차 닿지 않는 무수한 나날동안 이게 되겠어?라는 생각을 했다. 요즘 손끝은 물론 손바닥이 닿으려 한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던 때는 생각지도 못한 결과다. 불완전한 반복이 훨씬 가치 있다. 그냥 뭐라도, 실패하더라도, 한 개라도 하는 게, 한 번이라도 더 하는 게 훨씬 낫다. 이제야 알겠다. 다행스럽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