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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키비스트 Jul 12. 2020

인종간 입양: 문화학살과 60's Scoop

캐나다 원주민

19세기 후반부터 캐나다 정부는 기숙학교 (residential schools), 인디언 법 (Indian Act) 등 여러가지 식민 동화정책을 활발히 펴왔다. 이를 통해 원주민의 숫자를 지속적으로 줄여나가며 "완전한" 정착자의 나라를 꿈꿔왔다고 할 수 있다.  2008년 보수당의 하퍼 수상이 기숙학교에 대해 표면적으로나마 사과를 하고, 진실과 화해 위원회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ttee)를 통해 진상규명을 시도해왔다. 하지만,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현재 논쟁적이다.  


사실, 캐나다 원주민들에 대한 여러가지 통계수치를 보자면 그들의 처지는 절망적이다. 영아사망률은 캐나다 평균수치보다 높고, 자살률도 무려 5배나 높다. 여성들의 빈곤수치 역시 비원주민 캐나다여성에 비해 2배가 높다. 알버타주의 경우, 오일개발로 인해 원주민 거주지의 환경오염도 매우 심각하다. 원주민 수는 전체 캐나다인구중 5%정도를 차지할 뿐이지만, 캐나다 감옥 수감자들의 1/3이 원주민이다.


자유당 출신 수상이었던 크레티엥이 종종 언급한 "UN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캐나다"라는 수식어와 맞지 않게, 이 선진국안에서 원주민들은 "제4세계"의 조건속에 살고 있다.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열악한 지위는 다시말하면 식민관계가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진행중임을 뜻한다.


오늘은 이러한 결과를 낳게한 식민적 메커니즘 중의 하나인 60's scoop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1960년대 초반, 캐나다의 사회복지사들은 원주민 보호구역에 들어가 그들의 생활환경을 면밀히 감찰하기 시작했다. "비문명화된" 원주민들을 "문명화된" 캐나다의 기준에 동화시키고자, 알코올중독과 가난을 빌미로 원주민 아이들을 캐나다, 미국 및 독일의 "백인가정"에게 입양을 보내게 된다. 60년대에 대규모로 시행한 이 입양을 "60's scoop"이라 부르는데, 아이스크림을 푸는 도구인 스쿱처럼 마구잡이로 아이들을 퍼 담아 입양보낸 것을 비유한 표현이다. 대게 갓난아기부터 5세의 아이들이 그 대상이었고, 어떤 마을의 경우에는 단 한명의 아이도 남아나지 않았다고도 한다. 1970년대 이르러, 전체 원주민 아이들 3명중 1명꼴로 입양보내지거나 양육기관에 보내지게 된다.   


(https://www.leevalley.com/en-gb/shop/kitchen/serveware/74670-ice-cream-scoop)


아이들의 입양기록서에 출생지역이나 부족명 등이 잘못 기재된 경우도 많았다. 사회복지사들이 부모대신 입양동의서에 위조로 서명을 하는 등 위법행위도 있었다. 부모의 의사에 반해, 강제적으로 다른 그룹으로 아이들을 보내는 행위("forcibly transferring children of the group to another group")는 UN이 정한 학살 (Genocide)의 정의에도 부합한다. (https://www.un.org/en/genocideprevention/genocide.shtml)    


그렇기에, 대다수 아이들이 같은 언어를 쓰는 부족의 가정이 아닌, 캐나다, 미국, 독일 등 백인가정에게 입양보내진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도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아이들을 대량으로 미국, 유럽 등의 국가로 "수출"한 후, 입양아들이 성장과정에서 정체성의 혼란, 상실감, 우울증과 인종차별을 당한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에 입양보내어진 원주민 아이들은 그러한 성장과정을 거쳤다. 운이 좋은 아이들은 성숙한 양육자 부모를 만나 고등교육을 받은 후 "성공적인 중산층"의 일원으로 살아가기도 했지만, 입양된 아이들의 약 85%가 파양을 당해 보호기관에 넘겨지거나 홈리스가 되어 약물중독, 자살, 우울증을 경험했다고 보고된다.


"A Mother's Grief" by Kent Monkman (https://www.tvo.org/article/challenging-canadas-history-through-art)


이렇게 대대적으로 행해진 인종간 입양은, 아이들이 각 부족의 문화와 역사를 기억하고 유지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운이 좋아 양부모로부터 사랑을 받고 성장했다 하더라도, 만일 독일로 보내진 아이가 캐나다로 돌아와 친부모를 재회한다면 어떤 언어로 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서로를 알아볼 수나 있을 것이며, 죄책감과 원망을 어떻게 치유할수 있을 것인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더라도, 원주민들의 생활관습과 기억을 공유할 수 없으니 어떤 소속감을 느낄 것인가? 사실, 부족어를 쉽게 배울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지도 않았었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인종차별, 약물중독, 파양경험, 우울증 때문에 자신감있게 스스로를 정체화하기 어려워했다. 혹은 자살로 생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캐나다 땅에서 원주민의 수는 줄어들게 되었고, 다양한 부족의 문화승계도 그만큼 어렵게 되어 버렸다.


"Little Indian Foster Boy #4," ("Displaced Indians: The Sixties Scoop"전시회) by George Littlechild [작가 본인이 60's scoop의 희생자였음] https://www.gallerieswest.ca/magazine/stories/george-littlechild-and-the-sixties-scoop/ 


또한, 기숙학교와 60's scoop의 피해자인 이들은, 본인들의 아들딸을 어떻게 양육하고, 어떠한 가족을 꾸려야 하는지 학습하거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종종 관계형성에 어려움을 겪고 폭력을 대물림하기도 한다. 폭력과 가난을 대물림받은 원주민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최근 캐나다 정부는 원주민 출신 사회복지사들을 고용했다. 하지만, 원주민 사회복지사들은 캐나다 복지시스템에 고용되어, 여전히 그 아이들을 양육기관에 보내는 역할을 떠맡고 있다. 60년대가 아닌 현재에도, 빈곤, 폭력가정의 원주민 아이들은 여러 양육기관을 거치거나, 입양과 파양을 반복하며 저 우울한 통계의 수치로 기록되고 있다.


이렇게,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식민 동화정책은 현재 원주민 사회복지사의 손을 통한 "밀레니엄 scoop" 이란 오명을 얻고 지속되고 있다.  


백인 정착자의 나라 (white settler's nation) 캐나다 땅에서, 식민정책은 이토록 비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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