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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해씨 Aug 18. 2023

아이패드로 그리마 잡는 법


7년 전 집을 짓고 입주한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의 일이다.


저녁 배불리 먹고 거실에 앉아 아이패드 미니 레티나 16G로 영화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이 뇌졸중을 극복하고 스크린에 복귀 한다는 기사를 읽고 있었다. 거실 현관문 방향에 돈벌레, 쉰발이, 설레발이 등등으로 불리는 절지동물, 다지아문, 지네강, 그리마목, 그리마과에 속하는 그리마라는 놈이 설레발을 치며 오가고 있었다. 흉측한 외모와는 달리 바퀴벌레의 알을 비롯한 해충을 포식하는 익충이라 하는데 어쩌다 외모지상주의에 피해자가 되었나 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입주한 지 일주일도 채 안된 내 집 거실의 순결한 바닥에 불쾌한 궤적을 그리는 저 무도한 침입자를 무자비하게 응징하기로 그놈과 마주친 순간 결정을 해버렸다.


이동속도 초속 40㎝ 라면 바퀴벌레 귀싸다구 때릴 속도 아닌가? 손에 든 게 아무것도 없…. 아니 아이패드 미니 레티나 16G. 다급해진 나는 아이패드 미니 레티나 16G의 현재 고도와 낙하충격 등을 반영한 초정밀 연산을 그리마의 이동속도에 세재곱으로 끝내고, 오마이 소중한 아이패드 미니 래티나16G를 손에서 이탈시키는 모험을 감행했다. 낙하 예상 지점은 정확했고 낙하 속도도 순조로웠다. 이제 수평을 유지한 채 사뿐히 고강도 이태리 타올 타일 위에 착륙하며 절지동물, 다지아문, 지네강, 그리마목, 그리마과에 속하는 그리마라는 놈을 아주 납작하게 문질러 주면 게임오버다.


아뿔싸. 

손에서 이탈될 때 무게 중심에 미세한 변동이 발생했는지 계산과 달리 사선으로 내려꽂히는 불상의 추락 사태를 맞이하고, 그리마 이동 경로의 반대편으로 튕겨났다. 그 반동으로 레티나는 뒤집히면서 무구와 순결의 액정이 고강도 이태리 타올 (젠장! 대한민국 평범한 중년들에게 이태리와 타올은 자동 한 쌍이다. ‘나는 이제 지쳤어요’라는 문장을 읽거나, 말을 듣는 순간, 조금 숙연해지거나 연민의 감정이 발동되어야 하는데, 난데없이 “땡벌! 땡벌! ” 하는 소리가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 한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남녀노소 모두가 겪는 해괴한 일로, 천박하다가, 웃기다가, 종래에는 살짝 슬퍼지게도 하는데 한국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아니 이태리 타일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레티나의 안녕이 걱정되는 순간 내 정신이 파탄 날 지경이었지만 재빨리 정신을 수습했다. 안전 구역 확보를 위해 초속 80㎝쯤의 최고속력으로 방황하던 놈의 이동 경로, 그 끝을 침착하게 살폈다. 놈이 어둑한 거실 구석 카시오 전자저울 밑으로 숨는 장면을 목격한 순간 두 눈에 안광이 켜지고 입가에는 살기 충만한 미소가 저절로 만들어졌다.


세탁기 위에 파리채를 집어 들고 허공을 두세 번 갈라본다. 내 분노와 살기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절지동물, 다지아문, 지네강, 그리마목, 그리마과의 그리마 한 마리가 내 집 거실 카시오전자저울 밑에서 공포에 질린 채 얼어붙어 있는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왔다. 승기를 잡았을 때 온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 1번 경추를 시작으로 12개의 흉추를 거쳐 5개의 요추를 타고 흐르다 마지막 네 개의 꼬리뼈 그 4번 미추로 빠져나가며 내 몸을 미세하게 흔들어 주는 흐뭇하고 짜릿한 전율이다. 이럴 때 나의 뇌는 번쩍 황홀경이다. 흔치 않은 순간이다. 하지만 난 황홀경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이제 카시오 전자저울을 살며시 들추면 곧 뛰쳐나올 절지동물, 다지아문, 지네강, 그리마목, 그리마과의 그리마놈을 파리채로 사정없이 내려칠 것이다. 놈의 무수한 다리와 몸체를 분분히 산산이 날려버리면 게임오버다. 동시에 소중한 나의 레티나가 겪은 고통에 대한 처절하고도 무자비한 복수가 완성된다. 두~둥! 최대한의 섬세함을 유지하면서 전자저울의 한쪽 모서리를 살며시 들어 올렸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손끝에서 저울이 슬쩍 미끄러져 버렸다. 동시에 원초적 본능으로 무장한 채 다급히 뛰어나오던 절지동물, 다지아문, 지네강, 그리마목, 그리마과에 속하는 그리마라 놈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카시오 일렉트릭 웨이팅 머신의 발 같지도 않은 작은 돌기에, 기막히게 우연으로 찍혀 급사해버렸다. 게임오버. 아이패드 레티나 16G의 아름다운 액정 무사했고 임무는 완수되었지만, 뒷덜미가 조금, 아니 무척 많이 썰렁하다. 긴장과 허탈과 희열과 극초미세 나노 단위의 죄책감이 간극 없이 온몸에 동시에 머물다 사라져버리는 기묘한 상황이었는데 뭐라고 묘사하나? 썰렁 하달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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