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의 대규모 확산으로 선진학교 방문 일정이 취소된 후 자체 기획된 3일 중 하루.
다소 지루했던 어제의 DDP 서울도시건축비엔날에 관람에 이은 이틀째 일정이 시작되었다.
강사 섭외부터 일정 기획까지 섬세하게 예정되는 기왕의 답사 프로그램과 달리, 티몬 카드 결재로 급박하게 선택된 프로그램이기에, 우리의 기대는 간략했다.
더욱 가볍게 시작된 아침.
경복궁 매표소 앞에서 처음 만난 "한양 길라잡이" 상품의 김안나 강사는, 애초에 품었던 얕은 기대와 달리 풍부한 배경지식과 경험치에서 우러난 해설로, 날씨만큼이나 산뜻한 하루 일정을 선사해 주었다.
2년째 지속된 코로나와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준비로 중국의 공장들이 가동을 멈춘 덕에 틈틈이 올려다본 가을 하늘은 더없이 푸르다.
김안나 해설사의 안내는 쾌청한 대기를 거침없이 가르며 시작된다.
답사기의 바이블격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경복궁편을 효과적으로 압축했을 뿐만 아니라, 해외 외교사절단의 안내를 맡을 정도로 업계 최고의 전문성을 인정받았다는 그녀의 해설은 유홍준 답사기를구석구석까지 아우름과 동시에, 실록과 승정원 일기를 꼼꼼히 짚어가는 한편,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현재적 의미와 그간 보아왔던 여러 사극, 드라마의 기시감 어린 장면들을 묘파하면서 거침 없이 달려간다.
인왕산과 북악산이 한 프레임에 들어오는 포토포인트, 맑은 대기의 경회루가 시전하는 장쾌한 풍경을 뒤로 한 인증샷, 경복궁 각 회랑이 후면으로 펼쳐지는 원근감 살린 단체 사진 등은 예기치 못한 보너스였다.
광화문 일대에서만이 맛볼 수 있는 "광화문 막걸리"를 곁들인 점심 식사 후 본격적인 서촌 기행이 시작된다.
경복궁 3번출구 다이소 앞에서 시작된 오후 일정은, 서촌의 미로같은 골목길을 손금처럼 들여다본 자만이 알려주는 기이한 공간감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를 따라 다니는 동안 우리는 "그라운드시소" 같은 핫플을 지나, 아직까지도 이완용과 윤덕형 같은 친일인사의 구역인 옥인동, 필운동 골목골목을 거쳐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코앞에 위치한 종로 9번 마을버스 종점까지 숨가쁘게 달린다.
그 사이에는 약탕기 조각과 기왓장 파편에 정성껏 심겨진 온갖 다육식물 골목, 너무 많은 식물들을 잃어버린다는 원예치료사의 작은 앞마당을 거쳐 이병헌 와이프 이민정의 외할아버지 박노수 화백의 미술관 앞마당과 윤동주 시인의 부끄러움이 배어나오는 하숙집터를 차례차례 지나갔다.
비교적 젊은 층에 속하는 일행은 이런 골목이 기억에 없다고 했다.
어스름 내려앉은 시간, 저녁밥 익는 냄새 가득한 골목을 누비며 숨바꼭질 하다 술래 몰래 집으로 스며들던 어린 시절이 생생한 나는, 그런 기억이 없는 세대가 어쩐지 낯설다.
우리 집 옆골목에 살던 경미네 집 하얀 강아지며 그 집 밥상 위에 올려진 가지런한 숟가락과 반찬그릇마다 피어나던 고소한 냄새, 골목 하나를 돌아설 때마다 새로운 친구와 이야기가 펼쳐지던 그 시절을 이곳 서촌에서 참 오랜만에 떠올린다.
부암동 평창동 가는 초입에 위치한, 인스타그램 속 예쁜 카페와 젠트리피케이션 담론 속의 공간일 뿐이라 여겼던 서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