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가 중심인 삶을 산다는 것
홍채인식술이 알려준 내 삶의 이슈
안구의 홍채를 이용해 사람을 인식하는 ‘홍채 인식술(iris recognition)’은 이미 우리 삶의 여러 부문에 상용화되어 있다. 당장 내가 사용하고 있는 앱 카드만 해도 지문 인식과 홍채 인식으로 본인 인증을 하는 방식이 적용되어 있다. 일란성 쌍둥이라도 홍채 형태가 다르고, 생후 18개월 이후 완성되면 평생 변하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에 가능한 기술이다.
과학과 기술 영역에서 홍채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과 달리, 눈을 영혼의 창문으로 보는 이들은 사람마다 다른 홍채의 문양에 주목하여 그의 전생과 삶의 이슈를 읽어낸다. 예전에 한 홍채 연구가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내 홍채를 보고 삶의 이슈가 ‘발’과 ‘다리’에 몰려있는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렇게 모여있는 경우도 드믈다는 의견을 덧붙이면서.
그때 내게는 '동사'가 중요했다. 무언가를 하는 것, 될 것 같지 않은 일을 해 내는 것, 반대로 하지 않을 것과 할 필요가 없는 것을 가려내는 것, 해도 소용 없는 것으로 하루 하루가 점철되는 삶을 살았다.
한(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와 강박으로 꽤 오랜동안 힘이 들었다.
한창 상담과 내면 작업에 꽂혀 살아가던 때라서 그랬을까? 내 삶의 이슈가 '발'이란 사실이 싫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세상의 일에 몰두하는 삶이 어쩐지 차원 낮고 얕아 보인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그로 인해 사람들 삶에도 층하를 두었고, 목하 "성장"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나는 차원 높은 삶을 살아가는 중이라며 은근히 자부심을 갖기도 했다. 이왕이면 "가슴"이나 "영혼", "눈" 같은 곳에 이슈를 둔 삶으로 이행중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미성숙하기에 미숙한 것은 묘한 그리움이다.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보다 풍요하게 존재하는 것, 무엇을 이루기 보다 존재함 자체를 중대한 가치라 여기면서 살아가는 시절은 더욱 그랬다.
나란 인간이 몰딩자국 하나 없이 매끈하게 성형된 물레 출신 도자기가 아니라, 울퉁불퉁한 면들이 이렇게 저렇게 붙여지고 모여서 만들어진 사람이란 통찰을 얻고서야 비로소 그런 판단들을 멈출 수 있었고 그들에게서 놓여나게 되었다. 그렇다고 완벽한 자유가 찾아오는건지는 모르겠다.
작디 작은 통찰 하나에도 그림자와 걸림돌과 빛이 모두 필요하다. 덕분에 인생 모든 순간은 버릴 자락 하나 없음을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