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놉시스 중심으로 드라마 읽기
다시 보는 <미스터 썬샤인> 이야기-part 1
한 해가 저물어간다.
비슷한 계통이긴 하나 직장을 옮기고 작은 아이는 중학교에 입학하여 나름의 성장통으로 보냈던 다사다난 시간들,
지친 몸과 마음을 풀어놓을 휴가와, tvn 월 정액권을 신청한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정주행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 올 해의 마무리는 작년에 종영한 <미스터 선샤인>으로 골랐다.
최고의 드라마작가 <도깨비>의 김은숙이 쓰고, 배우 이병헌이 9년만에 출연하는 드라마이자 430억이 투입된 블록버스터 사전제작 등 많은 관심 속에 시작된 ‘미스터 션샤인’은 방영 당시 화제성 1위 드라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맥주 한 캔과 휴대폰 거치대를 챙기다 보니 드라마와 함께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나는 그때 어떤 생각을 하면서 그 드라마들을 만났을까?
430억 블록버스터 #션샤인, ‘시놉시스’ 하나만 봐도
많은 배우와 제작사, 투자자들은 작품의 출발점을 ‘책’에서 찾는다. 여기서 ‘책’은 대본이다. 제작사가 어디냐, 감독이 누구냐, 함께 출연할 출연진이 누구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좋은 대본이라야 인생작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해서, 목하 그 배우가 얼마나 핫 한지를 알고 싶다면 그의 책상 위에 얼마나 많은 ‘책’이 쌓였는지를 보면 된다.
하지만 배우는 그 책을 다 읽을 수 없다. 그럴 때 필요한 게 요약본, 시놉시스다. 시놉시스에 들어가는 요소는 대체로 주제, 기획의도, 줄거리, 등장인물이다. 필요에 따라서 배경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거나 인물간의 관계도를 추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드라마의 방영 시점부터 작품의 홈페이지에 고스란히 녹아들게 된다.
공 들인 드라마는 시놉시스가 다르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공중파 기준 40-50 여편의 드라마가 쏟아지는 현실을 생각할 때 시청자의 주목을 받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 매니아들에게는 공식 홈페이지의 시놉시스가 드라마에 정을 줄지 말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정보원이 된다. 시놉시스는 배우와 시청자 모두에게 그 드라마에 대한 첫 인상을 결정하는 순간인 것이다.
결국은 캐릭터이기에
시놉시스 중에서도 ‘등장인물 소개’는 첫 번째 체크 포인트다.
주인공들은 소개분량도 단연 길고 자세하다. 전체 이야기를 끌고 나가며 책임지는 입장이기 때문. 그런 당연한 지점보다는 조연과 단역들에게 어떤 이야기가 부여되는지, 얼마나 세심하게 소개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드라마에 들어간 정성과 품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스터 션샤인’의 공식 홈페이지는 시놉시스부터 ‘장인의 숨결’이 느껴진다. 주인공들은 차치하고, ‘그 외 등장인물’의 두 번째 인물인 ‘이완익’ 같은 인물의 소개만 봐도 그렇다.
“함경도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 둘, 아래로 동생 하나가 굶어 죽었다. 지주의 눈 밖에 나 소작 붙이던 손바닥만 한 땅도 빼앗긴 탓이었다. 완익은 부모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깨달았다. 완익은 어린 누이를 지주의 소실로 주고 받은 돈을 미국 선교사에게 갖다 바쳐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태어나고 보니 구한말, 함경도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다섯째 아들이라면, 그리고 하필 욕망의 크기가 남달랐다면, 그런 시대 그런 사회에서 ‘친일’이라는 선택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설명인 것이다. ‘미스터 션샤인’에는 이처럼 개연성 있는 캐릭터와 스토리텔링이 등장인물마다 담겨있어 드라마에 대한 기대를 키우고 있다.
기획의도 속 눈에 띄는 표현
첫 테마인 ‘뜨겁고 의로운 이름, 의병’은 비교적 평범하지만, 두 번째 테마로 걸린 ‘낭만적 사회와 그 적들’은 사회철학자 칼 포퍼의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차용함으로써 지적인 아우라를 풍기는 동시에 “그게 뭘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일제 강점기를 흔히 말하는 “치욕스럽고 힘들었던 비장미 가득한 시대”로 한정하지 않고, 새로운 문물의 유입으로 사회, 정신적 변화로 인한 낭만이 흘러넘치던 시대이자, 신분질서의 붕괴에서 비롯한 자유로움의 공기가 감도는 시대로 읽어내는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는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부터 새롭고 발랄한 해석과 재현 포인트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최근 들어 <암살>, <밀정>, <박열> 같은 영화들을 거치면서 호기심을 유발하는 친근한 시대로 부쩍 다가선 느낌이다.
과연 430억이 들었다는 ‘미스터 션샤인’의 1, 2회는 볼거리, 읽을거리, 들을 거리가 가득했다. 첫 회에서 구현된 전쟁 신과 시대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거리풍경, 주 조연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의상에 대한 고증은 그 자체로도 대단한 볼거리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대사로 일일이 설명하는 서사방식이 아니라, “보여주기를 통한 느끼기와 생각하기”에 초점을 둔 짜임새 있는 영상 언어도 심미적 감성을 자극한다.
생동감 넘치는 연기의 향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자 드라마 속에는 시놉시스에 담겨지지 않은 매력 투성이 인물들이 넘쳐난다.
고애신 가문, 김희성 가문, 이완익처럼 그 시절 사대문 안과 한성 언저리, 제물포 거리에 실제로 살았을법한 인물들이 있고, 일찍이 역사의 스포일러 덕에 익숙해진 근심 많은 황제 고종과, 간특한 친일, 친러 무리들, 이정문 같은 구한말의 충신들이 있으며, 판타지와 드라마적 재미가 강조된 유진 초이, 쿠도 히나와 구동매, 웃음 포인트를 담당하는 함안댁과 행랑아범, 일식이 춘식이 형제, 조역관 등 누구 하나 뺄 것 없이 다채로운 매력을 발산한다. 그들이 드라마에서 살아내는 순간들은 보는 사람 역시 고스란히 함께 살아낸 순간인 듯 생생한 대기가 살아 숨 쉰다.
선샤인보다 빛나는 선샤인의 배우들
이쯤 되면 배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미스터 션샤인’의 캐릭터를 맡은 배우들은 이병헌, 김태리, 유연석, 변요한, 김민정 등의 주연급을 제외하고 이전의 김은숙 드라마에 한 두 번 이상 출연하여 연기력이 검증된 얼굴들이 많다. 하지만 새로 결합한 배우라 할지라도 함안댁의 이정은, 막바지에 등장한 일본군 악당 모리 다카시의 김남희처럼 눈에 번쩍 띄는 연기를 내보이는 덕에 드라마 보는 즐거움이 더하고 있다. 그만한 연기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나머지 배우들과 스며들기 어렵고 시청자들의 높아진 감식안을 당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드라마를 계속해서 보게 되는 이유가 등장인물들의 삶에 대한 궁금증 때문인 경우가 있다. 그저 뻔한 인물의 뻔한 줄거리가 이어진다면 드라마를 계속 볼 이유가 없다. 공중파도 아닌 케이블 드라마인 ‘미스터 션샤인’이 15% 내외의 안정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것은 그저 좋아하는 배우와 때깔 좋은 화면을 구경하자는 마음 때문이 아니다. 드라마 속에 내가 생각한 방향과 다른 방향, 엉뚱한 선택을 하는 인물이 있을 때 궁금증이 증폭되고 본방 사수와 심하게는 ‘덕질’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