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라의 일상
전 섬에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섬에서는 육지를 가고 싶어 했고, 육지(시골에선 정말 이렇게 불러요)에서는 어떻게든 서울 근처로만 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워낙 작은 세상에서 살다 보니 해외라는 건 엄두도 낼 수 "와, 그래도 나 섬에서 서울까지 오고 출세했다"하고 말했죠.
그런데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가니 점차 주위에 해외여행을 가거나,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사람이 있거나, 호주나 캐나다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 많다는 걸 알고 그제야 국내가 아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아, 세상은 넓구나. 근데 난 뭐 하고 있지?"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여행을 가기란 무섭기도 했고 또 꼭 가야 할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삶에 염증을 느끼고 무기력증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았죠. 그러다 문득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여권 먼저 만들고 혼자 여행 가기 좋은 곳으로 추천받아 태국 방콕으로 행선지를 정했죠. 그렇게 27살에 여자 혼자서 첫 해외여행을, 그것도 자유여행으로 가게 됐답니다.
여행 처음 가보는 티 팍팍 내죠? 꼭 찍어보고 싶었어요. 게다가 여권도 없이 27년을 살아온 저였기에 여권케이스도 꼭 사고 싶었어요. 여행은 돈이 없었기에 제일 저렴한 걸로~비행기도 처음 탔답니다. 어떻게 타는지 몰라 직원들에게 물어물어 여기가 맞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비행기 좌석에 앉았지요. 그리고 너무도 순진하게 비행기 모드로 폰을 바꾸고선 "혹시 와이파이 돼요?"라고 물었다죠. 신발 안 벗은 게 어딥니까. 하하....
누가 그러더군요. 방콕에 가면 꼭 똠 양 꿍을 먹으라고요. 그래서 일단 시켰어요. 숙소 근처에 유명한 식당이 있어서 갔습니다.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데, 콘돔으로 장식을 해둔 곳이었어요. 하트 모양 밥과 "누가 추천한 거야. 죽여버리겠어"라고 혼잣말하며 습한 기운과 함께 태국에서의 첫 끼니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에서도 혼자 밥 잘 먹고 다녀서 해외에서도 혼자 먹는 건 그다지 걱정이 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후식으로 콘돔을 주시더라고요. 기념품으로 챙겨 오긴 했는데, 음 어딨는지 모르겠어요. 하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저는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오후에 도착한지라, 숙소에서만 있기에 아까워서 예쁜 원피스를 차려입고 당당히 파워워킹을 하며 걸어 다녔죠. 먹지도 않는 맥주를 마시려 펍에 갔는데 자리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곳에 있던 남자분들이 동시에 일어나 자기 자리로 오라며 "Wonderful Lady"라고 외치더군요. 음, 태국에서 너무 미녀 취급받아 한국 돌아가기 싫다고 인스타에 글 남겼다가 불법체류자로 걸리기 싫으면 제때 오라는 따끔한 충고를 받았더랬죠. 흠..
그런데 말입니다. 전 겨우겨우 토익을 900너무 기고 토익스피킹 2주 공부해서 턱 거이로 레벨 6을 받은 사람인데, 와! 영어가 통해요!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는데 영국 아저씨와 친구가 됐어요. 그리고 그 뒤로 계속해서 저녁식사 대접을 받았지 뭐예요. 새로운 발견. 나의 영어 공부는 쓸모없는 게 아니었구나. 돈 들인 보람이 있어!
그렇게 자신감이 충만해져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새벽같이 조식을 후다닥 먹고 일단 근처 호수에 갔어요. 호수가 얼마나 맑고 예쁘던지, 가만히 앉아서 음악만 들어도 동화 같은 설렘이 느껴지더라고요. 하지만 전 여행자이기에 아메리카노를 다 마시자마자 어서 일어나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2년 전이라 어딜 갔는지 기억은 잘 안 나요. 근데, 태국 하면 카오산 로드와 왕궁, 마사지잖아요? 그건 다 했습니다.
이렇게 황금빛 찬란한 왕궁으로 갔지요. 와.. 저는 왜 양산을 안 챙겼을까요? 온몸이 익었어요. 수분이 필요해요. 물을 사려고 했지만 이미 다 팔리고 태국 음료만 파는데, 너무 달아요. 게다가 가방 안에는 낮에 마트에 가서 이것저것 샀던 것 중 요기하려고 가져온 초콜릿이 있었는데 다 녹아버렸더군요. 너무 지쳐서 카페로 들어갔습니다. 와이파이를 위해서..
첫 여행 치고는 많은걸 준비해서 혼자 갔어도 이렇게 인증샷은 많이 남겼어요. 뒤에 관광객들 보이시나요? 으어어어 정말 힘들었답니다. 눈물샤워 말고 땀샤워.
그래도 사진은 계속된다. 돌아다니다 보면 호객행위를 참 많이 해요. 일본어를 하기도 하고 중국어로 말하기도 하죠. 그럴 때마다 웃으며 "I'm South korean"이라고 하면 급 언어를 바꿔 "예뿨요~뷰티풀~" 어머나, 도대체 몇 개 국어를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다음 사진을 보기 위해 여러분에게 심호흡할 시간을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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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태국 전통의상 입니다. 전 입을 생각이 없었어요. 근데 관심만 보이고 제가 가버리자 주인이 오더니 무슨 마약 밀거래하듯이 귀에 대고 반값에 해주겠다고, 돈도 남들 안 보이게 뒤로 쓱 가져가는데 진짜 007인 줄... 그리고 제 몸에 점점 뭔가가 겹쳐지기 시작하더니 이렇게 됐습니다.
이거 입고 있으니 여행 온 다른 외국인들이 저더러 현지인이냐고.... 같이 사진 찍자고..... "Nope! I am a traveler"라고 말했죠. 아주 깜짝 놀라더군요. 지인들에게 사진을 보내니 태국 관광책자에 나올법한 사진이라고.....ㅋㅋㅋㅋ 저 우람한 팔뚝이며, 분명 공주옷인데 왜 왕자 느낌? 어째서? 심지어 저 사진은 우리 어머니의 최애 사진입니다. 이 사진 정말 좋아하세요. 이해할 수 없음...
왕국에서 저기 전통의상 사진 찍은 곳으로 가려면 저 반대편으로 가야 해요.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고요. 흐릿했지만 나름 멋진 사진이 나왔어요. 보정 덕분... 태국은 스콜이 유명하다는데 전 3박 5일 여행하는 동안 한 번도 비를 맞은 적이 없었어요. 첫 여행자를 위한 배려인가 봅니다.
앗. 카오산로드 사진이 빠졌네요. 거긴 정말 현지인보단 여행자들이 많았어요. 물가도 싸서 쇼핑도 하고 팟타이에 맥주도 마시고 길거리에서 파는 온갖 열대과일 호로록하면서 자유를 만끽했죠. 내일은 없다는 듯이... 한국에서는 그렇게 우울하더니 해외 오니 자신감이 솟아나고 영어로 말도 잘하고 다녀서 저도 놀랐어요. 절대 영어를 잘하는 편이 아닌데 신기하게 대화가 통해서 재밌었어요.
마지막 날, 다른 공원으로 갔어요. 오리배를 탔답니다. 무려 3시간을...ㅋㅋㅋㅋㅋㅋㅋ 그냥 저 호수에 둥둥 떠있는 게 좋더라고요. 이국적인 배경을 보면서 음악을 들으니 다른 세계에 온 기분이었어요. 그러다 악어를 마주치고... 오리배가 땅에 끼여서 현지인에게 도움 요청해 겨우 다시 물로 나오고 그랬더랬죠.
반얀트리 문바(Moon bar)입니다. 비행기 안에서 친해진 아이들 말로는 마지막 날에는 호화스럽게 놀아야 한다고 해요. 사실 전 고소공포증이 있거든요. 그래서 높은 곳에 못 가는데, 해외여행 왔으니 한국에서의 나는 버려야겠다고 하고 큰 맘먹고 68층인가 하는 높이로 올라갔습니다. 근데 웃긴 건 그보다 훨씬 더 높은 높이로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었다는 거죠. 비행기는 잘만타면서 왜 여긴 무서운 걸까 하고 웃었답니다. 바람불면 정말 빌딩이 휘청거리는 기분이었거든요 ㅠㅠ 시원한 바람맞으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이렇게 짧고도 강렬한 저의 첫 해외 여행기. 다녀와서 30시간 정도를 잔 거 같아요. 하루에 4~5시간 자면서 종일 걷고 돌아다니고 했으니 몸살이 났어요. 그리고 일어나 캐리어를 정리하면서 그 며칠간의 시간이 꿈처럼 느껴졌어요. 불과 하루 전만 해도" 난 다른 나라에 있었는데, 오늘은 다시 나의 세상으로 돌아왔구나. "하는 허무감이요.
그래도 얻은 건 많았어요. 외국인들에게 들은 수많은 칭찬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던 영어실력, 그리고 어디든 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돌아오자마자 다음에는 어느 나라를 갈지, 1년에 꼭 한 번씩은 여행을 가자고 다짐하게 됐답니다. 다음엔 더 많이 걷고 더 많은 새로운 사람과 어울리며 추억을 만들자고 다짐했어요.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하다고, 늦게 간 해외여행에 재산을 탕진하려고 합니다. 탕진할 재산이 없는 게 함정이지만.. 그래도 틈나는 대로 전 떠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