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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미경 Oct 04. 2018

3.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카뮈가 말한 이방인은 나였다.

 크~드디어 나왔습니다. 이방인은 몰라도 카뮈는 다들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논란도 많고 스테디셀러로 많은 사랑을 받기도 하는 이 책. 여기서 저는 무엇을 읽고 어떤 현실을 비교하고 싶었을까요? 먼저 제가 읽은 책은 이정서 역 <이방인>이라는 것을 알립니다. 기존 번역본과의 차이가 있어서 책의 해석도 조금 달라져요.     


 이방인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강렬한 햇빛에 이끌려 살인을 저질렀다”가 아닐까 합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이방인’이라는 단어는 정말 맘에 들었고, 내용도 마음에 들었지만 뜬금없이 햇빛이랑 살인이랑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던 책이었어요. 당시 제가 읽었던 책은 더클래식에서 출간한 번역본이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 ‘뫼르소’가 이방인이라는 그 말이 마음에 콕 하고 박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던 묘한 책이었죠.


 그래서 카뮈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부조리! 부조~리!를 외치던 사람이라고 해요. 비슷한 작품으로 <고도를 기다리며>가 있는데,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고 지식人에 검색해 봐도 도무지 부조리라는 가치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조리에 관한 카뮈의 생각이 담긴 책이라는 데, 부조리를 이해 못하다니. 김치전 만들겠다면서 김치 없이 밀가루만 넣고 전 부치고 있는 꼴이 아닐까 싶었죠. 부조리의 사전적 정의는 “불합리, 불가해, 모순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카뮈에 따르면 인간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고, 이에 인간들은 불합리하고, 모순이 가득하며 그 덕분에 의미 없고 목적 없는 삶을 산다고 해요. 그런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하는 것이 그의 주장이라고 합니다.   

 

 신화에 나오는 시시포스의 삶이 딱 그렇죠. 신에게 벌을 받아 평생 어마어마하게 큰 돌을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고, 산꼭대기에 도착하면 그 돌은 다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그 돌을 다시 꼭대기로 올려놓는 벌을 받습니다. 의미 없는 삶이죠. 실제로 <시지프 신화>라는 글을 통해 실존주의 문학을 관철시키기도 했고요. 이런 의미 없는 삶을, 부조리한 삶을 사는 게 인간이라고 말해요. 그런데 이 부조리와 이방인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방인의 첫 문장은 이렇습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인지도,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통을 받았다. ‘모친사망, 내일 장례식, 삼가 애도함’”


과연 카뮈다운, 우울하면서도 차가운 첫 시작이었습니다. 강렬했죠. 첫 문장이 주인공인지 아닌지도 모를 사람의 모친 사망이라니!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첫 문장에서부터 주인공 ‘뫼르소’의 성향과 카뮈가 말하고 싶던 사회의 부조리의 시작점이 되는거죠. 보통 가족의 죽음을 통보받는다면, 사람들은 슬퍼합니다. 예외적으로 부모님과 관계가 아주 좋지 못해서 연을 끊고 사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슬프고 억장이 무너지죠. 하지만 뫼르소는 저 문장에서 보다시피 어제인지 오늘인지 알 수 없는 엄마의 죽음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어요.     

 뫼르소는 엄마의 나이도 모릅니다. 경제적 상황으로 병든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놓고 찾아가지도 않았죠. 엄마가 어떤 사람들과 친했는지, 그곳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몰라요. 아들이라고 찾아온 뫼르소에게 사람들은 이것저것 묻지만 그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담배도 피고, 커피도 마시고 엄마의 얼굴을 보겠냐는 말에 그대로 두라며 관 뚜껑을 열어 영면에 든 엄마의 얼굴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장례식 내내 표정 변화도 없고 일이 다 끝나자마자 서둘러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그의 행적은 훗날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되죠.    

 

 그리고 아주 큰 늪, 바로 옆집에 사는 남자 ‘레몽’과의 만남입니다. 레몽은 자신의 정부를 욕하고 때리고 경찰서까지 다녀오는 인물인데, 이 사람과 친구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사건이 벌어지게 돼요. 함께 간 여행에 레몽을 노리는 불량배들이 함께 따라온 거죠. 레몽이 열심히 팬 여자의 복수를 위해 보낸 건달들이 해변가에 놀러온 남자들을 위협합니다. 그렇게 지나간 줄 알았던 그 건달들과 또 마주치게 되죠. 옆에 있던 뫼르소의 일행은 마침 총을 가지고 있었고, 쉬고 있는 그 건달들에게 총을 쏠까 말까 고민하던 중 뫼르소는 총을 자신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뫼르소 혼자서 해변을 나갔다가 다기 건달 한 명과 마주치게 되는 데, 그때 빼앗은 총이 주머니 안에 있었어요. 햇빛은 왜이리 강렬한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건달의 칼은 왜 이리 반짝이는지 눈을 뜰 수 없었고 번쩍임과 동시에 총을 쏴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인범이 됩니다.     


 지금이었다면 정당방위죠. 아, 한국에서는 제외입니다. 제가 알기론 국내에서 정당방위로 인정받으려면 아주 많은 조건이 붙어야 한다고 들었거든요. 그렇지만, 앞서 말한 뫼르소의 언행들로 인해 법정에서 증인들이 뫼르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합니다. 평소에도 이상한 사람, 어머니의 죽음에 무관심하고 눈물도 흘리지 않던 사람. 그러니 살인을 저지르기에 충분하다는 것으로 판결이 납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감옥에서 삶에 대해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줄거리는 여기까지입니다. 과연 뫼르소는 정당방위가 아니라 정말 살인범이 맞을까요? 그 사회에서 경계하고 의심해야 할 ‘이방인’일까요? 만약 그가 이방인이라면 저 또한 우리 사회에서 이방인이 아닐까 하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가족의 죽음에는 슬퍼해야 한다”는 사회가 정해놓은 암묵적인 규정에 따르지 않아 살인자와 동시에 이방인이 된 뫼르소. 저 또한 사회가 정해놓은 암묵적인 규정에 따르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한 사람이었기에 ‘나도 이방인이구나’하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부당한 일은 참지 못해요. 그래서 남들이 말하는 아부하고 자신의 인격까지 내려놓으면서 해야 하는 ‘사회생활’은 이해할 수 없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꼭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런 성격으로 회사에서 있었더니 “별 것도 아닌 일에 꼬박꼬박 따지고 대드는 인성 밥말아 먹은 건방진”사람이 됐습니다. 상사의 잘못을 제가 다 뒤집어쓰고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그런 부조리한 일을 참을 수 없어 논리적으로 반박하니 저런 사람이 됐습니다. 남들이 보면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이방인인거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성추행을 당했던 때, 같은 여자들에게만 털어놓고 신고할지말지 울며 상담을 요청한 제게 돌아오는 말은 “그러게 왜 옷을 그렇게 입고 다녀?”, “클럽은 부비부비하려고 가는 거 아니야?”, “어차피 경찰서 가도 네 편 안들어 줄 걸?” 하는 말만 듣고 상처받았죠. 사회에서 내린 성추행의 원인은 피해자에게 있다는 생각을 몸소 경험했습니다. 행실까지 운운하는 모습에 더 큰 상처를 받았어요. 신고한다고 하니 호들갑이라는 반응에 저는 다시 이방인이 됐습니다. 정말 저런 사람들이 있냐고요? 네. 있습니다. 저 사람들의 말을 따르면 저는 세상 모든 남자들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의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면 또 사회와 동떨어진, 사상이 이상한 사람이 되어 이방인이 되겠죠. 뭘 해도 이 문제에선 제가 이방인처럼 느껴졌어요. 제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한결같은 반응이었으니까요. 또, 알지도 못하는 연구실 대선배님의 모친상 장례식에 가서 슬픈 척, 위로하는 척 해야 하는 때가 있었죠. 사실 전혀 슬프지도 않았고 왜 제가 이 자리에 와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어요. 그저 연구실 선배들이 다 가니까, 빠질 수가 없어서 간 자리에서 연기를 한 거죠.     


 카뮈는 자신의 작품 <이방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우리 사회는,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라도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나는 단지, 이 책의 주인공이 그 손쉬운 일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선고받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제가 겪은 현실들이 명백해 졌어요. 사회가 정해놓은 손쉬운 일을 하지 않고 저만의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죽음까지는 아니지만, 사회에 적응하지 못 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저를 기억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이런 우리 사회에서 누구든 이방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슬프지 않으면 울지 않아도 돼요. 가엾다고 생각되지 않는 일에 굳이 사회의 시선을 생각하며 가여워 하는 척 하지 않아도 돼요. 우리에게는 부조리한 일이 생기면 그에 대한 정당방위를 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카뮈가 있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이방인이 이런 의미라면, 뫼르소가 이방인이라면 우리 모두 이방인이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아니면 언젠가 이방인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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