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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미경 Oct 20. 2018

4. 로맹가리의『자기 앞의 생』

사회에서 버려진 이들 간의 애틋함

4. 로맹가리, <자기앞의 생>



책을 많이 읽는 저는 타인의 인생책이 궁금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책 추천을 부탁하니 TOP5에 로맹가리의 <자기 앞의 생>이라는 책을 추천하더군요. 제가 진행했던 독서모임에서도 로맹가리의 책을 가져온 분도 꽤 있었고, 책이 없어도 토론 주제로도 자주 언급이 됐기에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 궁금했습니다. 읽어야죠! 이건 읽어야만 했습니다.     


 처음 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왜 이 책이 인생책인지 이해가 안 갔어요. “왜지? 내가 기대가 너무 컸나?”하는 마음으로 책의 내용을 다시 곱씹어 봤죠. 그래도 잘 모르겠어요. 로자 아줌마는 너무 격하고 못됐고 우울증에 울고불고 늙고 추했습니다. 그런 로자 아줌마 밑에서 자라고 있는 모모는 가끔 못된 짓도 하고 그 나이에는 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이렇게 열광하는지 의문이 들었죠. 그러다 문득, ‘사랑’이라는 단어와 ‘사회적 약자’라는 단어가 교차했어요.   

  

 

그때서야 로자 아줌마와 주인공 모모의 이야기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 짓고, 후자에는 보통 나쁜 사람도 많지만 대부분 사회적 약자가 아닐까 싶었어요. 가령 불우한 가정한 아이들은 사랑보단 동정을 받고, 장애인은 사랑이 아닌 도움을 받고, 과거에 돌이킬 수 없는 일로 큰 상처를 받아 구석에 숨어 사는 사람들은 그저 안쓰러운 눈빛과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곤 합니다.     


 그렇지만 사랑받을 자격은 살아있는 것이든 아니든 모두 다 있지 않을까요? 단지 사회적 약자라고 해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는 건 아닌데, 저는 너무도 당연하게 책 속의 두 사람을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두 사람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말에 수긍하지 않았죠. 그렇게 혼내고 서로 욕하면서 “사랑은 무슨, 돈을 위해 모모를 거뒀을 뿐이고 부모의 자리를 대신해 준 로자 아줌마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던 거였으면서!” 하는 모난 생각을 했죠.     


 제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고, 받아들이고 싶은 부분만 받아들이니 놓친 부분이 많았던 겁니다. 돌이켜보면 로자 아주머니는 모모를 너무 사랑해서 일정 나이가 되면 자신의 집에서 내보내는 것이 두려워 처음부터 아이의 나이를 속였죠. 평생 어린아이가 되어 상처받고 외톨이가 된 자신의 곁에 두고 아낌없이 사랑하고 싶었던 겁니다. 아마,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모모에게 느껴지던 그 무언가가 있었나 봐요. 그렇지 않고서야 나이를 줄여 오래 곁에 둘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얼마나 사랑했으면 부모가 돈도 보내오지 않는 모모의 나이를 속였을까요.     


 모모는 또 어땠을지 생각해 봤어요. 자신의 아버지가 왔을 때 모모는 로자 아줌마의 거짓말에 동조했어요. 자신이 친자임을 알지만 옆에 있던 다른 아이를 친자라고 속이고, 충격에 눈앞에서 죽은 아버지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죠. 자신을 버린 아빠라는 존재에게 어떤 정이 있었을까요? 종교를 운운하면서 종교가 다르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 모습에 모모도 상처받았을 거예요. 반면 로자 아줌마는 모모가 어디서 왔고, 본래 종교가 무엇인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저 모모 그 자체로 받아들였고 이런 마음을 모모도 알아챘겠죠.     

 그러니 모모는 죽은 로자 아주머니를 지하실에 숨겨놓고 지극정성으로 돌봐줬겠죠. 그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알지만, 자신의 나이를 속였다는 것도 알게 됐지만, 아버지도 못 만나게 했지만 생전 그녀가 원하던 아름다운 모습을 위해 화장을 해주며 몇 날 며칠을 죽은 아주머니 곁을 지킵니다.   


 애잔하면서도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한참 고민하게 만들던 책이었어요. 우린 ‘사랑’이라고 하면 남녀 간의 사랑을 제일 먼저 떠올리잖아요. 연인에게 수십 번, 수백 번도 넘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인종차별과 학대로 상처받아 사람이 무서우면서도 모모에게 “너를 사랑해서 그랬단다. 네가 빨리 떠날까 봐 네 나이를 속였어”라고 말한 한 번의 사랑이 더 깊이 있게 느껴졌어요.     


 우리도 물론 상처받고 헤어지고 그러다 다시 사랑하고 그렇지만, 겉모습도 따지지 않고 피도 섞이지 않은 두 사람이 그렇게 애틋하게 사랑하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에서 진정한 사랑을 봤어요. 어쩌면 그들에게는 ‘로자’와 ‘모모’만 존재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답니다. 사회에 속한 그들은 동정받는 약자일지 몰라도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 그 자체의 사랑만이 존재하지 않았나 하는 조금 멀리 나간 생각도 해봤지요.     


 물론 모모가 키우던 강아지를 자신보다 더 잘 키워줄 수 있는 돈 많은 집에 돈을 받고 보냈다는 죄책감에 그 돈을 하수구에 버린 일로 로자 아줌마는 아주 큰 화를 내긴 했지만요. 또 한편으로는 ‘사랑이 밥 먹여 주냐?’하는 현실적인 사랑을 본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로자 아줌마의 마음은 모모가 미웠다거나 그 돈을 버린 철없음에 화가 났다고 하기보단 그 돈으로 모모에게 뭔가를 더 해줄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아주 주관적인 해석을 내려 보기도 했어요.     


 

여러분이 생각하기엔 어떤가요? 남녀 사이의 사랑을 떠나 ‘사랑’ 그 자체에 대해 고민해 본 적 있으신가요? 또 사랑할 자격이 따로 있는 걸까요? 가끔 이런 말을 듣잖아요. “네가 지금 연애할 때니?”하는 말이요. 연애할 자격이 없다는 것, 사랑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인정하는 사회가 아닌가 싶어요.   

  

 로맹가리의 ‘자기 앞의 생’에 나온 이 두 인물은 과연 사랑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서로 사랑할 자격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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