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과연 여기서 몇 년이나 있을까?
1. 로스쿨 진학 이유: 조직에 대한 의존도 낮추기
조금 뜬금없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로스쿨 진학을 결심했던 이유 중 하나는, 출산이다. 언젠가 할지도 모르는 출산을 염두에 두면서, 실제로 친구에게 "내가 로스쿨에 가려는 이유 중 3할은..."이라며 이야기한 적도 있다. 어렴풋이나마 회사원으로서는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법적으로 보장된 기간 내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 쓰기 어려울지도 모르고, 나아가 그 기간 이상으로 휴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저찌 휴직을 하는 경우에도 내가 그간 조직에서 쌓아온 것이 무너질 것 같았다. 이렇게 '출산'과 뒤따르는 '돌봄'을 놓고 생각해보니, '조직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직장인의 삶이 더욱 아쉽게 다가왔다. (당시 학생이던 내가 특별히 회사원의 삶이나 휴가제도, 관련 실태에 대해 잘 알았던 건 아니다.)
그에 대한 솔루션이 꼭 이것 하나만은 아니었겠지만, 자격증을 취득해서 전문가로서 언제든 일자리를 만들거나 구할 수 있다면 '조직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자유로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여러 이유들도 더해져서, 어쨌거나 지금은 변호사가 되어 있다.
2. 내가 현재 몸담은 조직에서 몇 년이나 있을 것인가?
실제로 변호사가 되어 주변을 보니 조직에 대한 의존도가 낮은 측면이 이직을 자유롭게 하는 현상으로 발현되는 것 같다. 예컨대 어떤 분은 1년에 다섯 군데의 직장을 거치기도 했고, 2년차에 세 번째 직장에 있는 것 정도는 그렇게 특별히 눈에 띄는 사례도 아닌 것 같다. 본인이 충분히 만족하는 직장들을 이곳저곳 쇼핑하듯 골라다니냐 하면 그건 아니긴 하다. 로펌이든 기업이든 실제 근무를 해보고 만족도가 떨어져서, 이직 횟수가 많아지는 것을 감수하고 빠르게 이직을 시도한 경우인 것 같다.
그런데 오히려 조직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니, 오히려 길을 잃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내가 현재 몸담은 조직에서 몇 년이나 있을 것인가?
주변 변호사들에게 물어봤을 때 5년, 아니 3년 뒤에도 이 조직에 다닐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3년 전에는 이 조직에 있을 줄 알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해보면 더욱 쉽게 답을 해줄 것이다. 그래서 다들 "내가 이 조직에 얼마나 있을 것인가?"라는 고민을 은연중에 어렴풋이라도 하면서 지내는 것 같다.
3. 저년차 어쏘 변호사라면
로펌에서 변호사생활을 시작한 저년차 어쏘 변호사라면 누구나 생각해보게 되는 부분들이 있다.
첫째로,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과거에는 절대적으로 '좋은 직장'으로 여겨졌던 곳들에 대한 인식이 개인마다 달라지고 있다. 이를테면 업무강도가 높은 큰 로펌의 경우 과거에는 다른 직종 대비 매우 높은 급여로 보상이 이루어졌지만, 요즘은 업무강도를 고려하면 다른 직장인들에 비해 급여가 그리 높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근로소득보다 자본소득의 위력이 주목 받는 상황, 그리고 직장이나 사회에서의 입신에 비해 워라밸이 점점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상황까지 더해지니, 아직도 다들 가고 싶어하는 큰 로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계속 남아있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애초에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된 것 같다.
둘째로, 로펌에 있다보면 주로 페이퍼워크를 담당하는 어쏘 변호사에서, 사건을 수임해오는 것이 주요 임무인 파트너변호사로 직급을 올려야 하는데, 어쏘 변호사로 근무하면서 파트너 변호사로서 갖추어야 할 수임역량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다. 어떻게 수임을 잘하는 파트너 변호사가 될 것인가? 수임을 잘할 수 있다면 로펌에 계속 머무르는 것과 개업을 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유리한 선택일까? 이런 고민들을 해보게 된다. (덧붙여 보면, 선배 변호사님으로부터 직접 듣기로는 여러 로펌에서 과거에는 선배 변호사님들이 후배에게 고객을 떼어주고 물려주는 일이 많았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 아랫 세대들이 크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고 한다.)
4. 변호사 커리어에도 예외는 없다: <안티프래질>이 주는 교훈 ─ 불확실성을 견디기, 변화 속에서 더 강해지기
인생사 새옹지마라지만, 특히나 "변호사의 커리어패스는 한치 앞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물론 같은 조직에 오래 머물기를 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선택이 5년 뒤, 10년 뒤에는 어떤 선택지를 열어줄까? 선배에게 물어본다고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다. 애초에 공부와 달리 답이 없는 문제라 막막하고 어렵다. 실존적 결단을 내리는 것, 이 결국 마지막 스텝이겠지만 그 전에 어떤 부분까지 미리 예측하고 고려할 수 있을지 생각하다 보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읽은 <안티프래질>이라는 책이 더욱 와닿는 것 같다. 저자 나심 탈레브는 '안티프래질(antifragile)'한 속성을 '불확실성과 스트레스 속에서도 더욱 강해지는 능력'으로 정의하는데, 이를 변호사로서의 삶, 특히 불확실한 커리어패스와 연결지어 생각해보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변호사로서의 삶은 다른 직업에 비해 비교적 '조직에 대한 의존도'가 낮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선택지와 이직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오히려 불확실성이 더 커지는 측면이나, 어떤 선택이 내게 더 나은 미래를 열어줄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측면도 있다. <안티프래질>의 대목들이 불확실성과 변화 속에서 스스로를 다잡고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준다. 내가 주목한 몇 가지 포인트를 아래에 옮겨 보았다.
우리는 무작위성이란 위험한 것이고, 나쁜 것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산다. 장인, 택시 운전기사, 매춘부(대단히 오래된 직업이다), 목수, 배관공, 재단사, 치과의사는 소득이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소득을 제로로 만들어버리는 크지 않은 블랙 스완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들은 위험 요소를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안정적인 회사원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인사팀이 주는 전화 한 통에 소득이 제로가 되는 끔찍한 상황을 경험할 수 있다. 회사원에게는 위험이 숨어 있다.
기능을 보유한 사람들은 무작위성 덕분에 일정 수준의 안티프래질을 지니고 있다. 작은 변화는 그들에게 적응을 요구하고, 주변 환경으로부터 배워서 끊임없이 변화하라고 압박한다. 스트레스는 정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 적응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끊임없이 노출된다.
1) 자영업자나 기술자처럼 자신의 능력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무작위성 속에서도 잘 살아남을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이 불확실성이 주는 압박과 스트레스에 잘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큰 조직에서 받는 보상이나 안정감이 때로는 프래질(취약성)을 키우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조직 의존도를 낮추고 불확실성을 감내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는 부분도 크다.
스토아 철학에 내재된 정신적 강건함
성공은 비대칭성을 야기한다. 당신은 이제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훨씬 더 많다. 따라서 프래질하다. (...) 부자가 되는 순간, 재산을 잃었을 때의 고통은 재산을 늘렸을 때의 기쁨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부자들은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혈당이 증가하고, 유머 감각은 줄어들고, 머리카락은 코끝까지 내려오는 등 다양한 형태의 고통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재산으로 인해 궁지에 빠진다. 세네카는 재산이 우리에게 하강국면을 걱정하게 만들면서 우리가 의존할수록 형벌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재산은 항상 더 많아져야 하고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상황(정확하게 말해서, 상황에서 비롯되는 심적 상태)에 의존하면서 일종의 노예 상태로 만든다.
고대 사람들은 좋은 상태와 나쁜 상태, 이익과 손실 간의 이런 비대칭성에 익숙해져 있었다. (...) 당신이 잃을 것은 많고 얻을 것이 별로 없는 상황에 있다고 가정하자. 재산이 늘어난 것, 즉 약 30만 원을 번 것은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지만, 같은 금액을 잃었을 떄에는 더 큰 상처를 입는다. 따라서 당신은 비대칭적인 상황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비대칭적인 상황은 좋은 것이 아니다. 당신이 프래질하기 때문이다.
이런 프래질에 맞서기 위해 세네카가 제안하는 실천적 방법은 재산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수양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는다. (...) 지적 활동의 본질은 손실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처럼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재산을 가치 없는 것으로 바라보기 위한 수양을 해야 한다. 그래서 손실로부터 고통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무작위성으로 가득 찬 세상은 더 이상 당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3) 스토아 철학이 주는 정신적 강건함에 대한 교훈은 변호사로서 하게 될 커리어 고민에도 적용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커리어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불확실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변화 속에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데 집중해볼 수 있겠다.
가끔 과거에 했던 고민들을 돌아보면 현재에는 이미 다 해결된 것들이거나, 이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고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그 중 일부는 아직까지도 유효한 고민일 때도 있고. 지금의 고민들은 나중의 내게 어떻게 느껴질 것인지도 궁금해진다. 그렇지만 이 고민의 큰 틀은 아마 연차가 얼마나 쌓이든, 어떤 조직에 있든 간에 계속 끌고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24년 4월 12일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