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시리즈>
고대부터 인류는 추상적인 상상력을 다양한 예술작품을 통해 표현해왔다. 구체화된 상상력은 공론장의 형성을 이끌었고, 공론장에서의 토론은 인류가 추상적인 상상력을 현실화하기 위해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의 도전을 유도하며 과학 기술 발전을 통해 인류는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신화와 문학으로부터 영화로 이어지는 대중문화는 기술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 가능한 문제점을 공론화하며 인류의 진보에 기여했다.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는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로 실현됐고, 파우스트의 호문쿨루스는 AI로 나타나고 있다. 최초의 상업영화 열차의 도착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이 산업혁명을 연상시키는 열차를 다룬 것과, 최초의 SF영화 달 세계 여행Le Voyage dans la lune이 인류의 꿈인 우주여행을 소재로 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현대 대중문화 중 가장 파급력이 큰 영화는 인류의 상상력을 구체화하여 공론장을 형성한다. 이렇듯 영화는 다가오지 않은 인류의 미래를 표현하는 일종의 선행 지표로 작동한다. 따라서 영화를 통해 인류의 상상력을 분석하는 것으로 향후 기술의 발전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가설을 검증하고자 현재 가장 이슈가 되는 기술인 AI를 다룬 대표적 영화[1]를 Ⓐ AI의 형태가 인간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 Ⓑ 자기판단능력을 갖지 못한 채 다른 주체에 종속되어 명령을 수행하는 경우, Ⓒ 자기판단능력을 가지고 인간과 같이 스스로 행동하는 주체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비(非)인간 형태의 초기 AI는 사지를 가진 외관으로 발전했고, 나아가 내면까지도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게 됐다. Ⓒ 단계의 AI들은 인간을 보조하기 위해 탄생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적인humane AI와 비인간적인 인류humankind의 대비를 통해 인간적인 것의 본질과 기계와 인간의 경계에 대한 고민을 안긴다. 현재 과학 기술의 단계는 Ⓐ와 Ⓑ 사이로, 그래프를 통해 향후 AI 기술이 Ⓒ의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세부적인 논의를 위해 에이리언 시리즈를 분석해보자. 에이리언 시리즈는 매 작품에 새로운 AI가 등장하며 이를 통해 AI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시리즈의 시작인 Alien(1979)의 AI ‘Ash’는 인류를 단순히 실험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당시 2001: A Space Odyssey(1968)을 필두로 기계에 의해 인류가 전복된 디스토피아를 예상하던 당시 시대상이 반영된 것이다. 한편 Aliens(1986)의 AI Bishop’은 선한 마음을 가지고 인류를 돕고자 하지만, 주인공 리플리는 전작의 Ash에 대한 기억으로 Bishop을 믿지 못하는 모습을 극 후반까지 보이며 ‘AI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면, 그 AI의 행동이 선의인지 악의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AI에 대한 인류의 과거 디스토피아적 상상에서 한 층 나아간 태도이다. 복제양 돌리의 탄생으로 복제에 대한 논쟁이 뜨겁던 시기에 영상화된 Alien Resurrection(1997)의 AI ‘Call’은 인류에 반발하여 탈출한 AI이자 인간보다 인간다운 인물로 묘사되며, 복제인간이 된 주인공 리플리는 자신의 또 다른 복제인간들을 보며 고통을 받는다. AI 혹은 복제인간이 현실의 영역에 접어드는 시기인 20세기 후반, 영화는 인간이 아닌 AI와 복제인간 입장에서 영화를 이끌며 새로운 생각의 장을 제공한다.
지난해 개봉한 시리즈의 신작 Alien: Covenant(2017)에서는 창조의 능력을 가진 AI ‘David’와 그의 후속 모델이자 모든 면에서 월등하지만, 창조의 권능이 ‘너무 인간 같다는’ 이유로 제거된 AI ‘Walter’의 갈등을 통해 논의를 ‘인간이 창조한 AI’에서 ‘AI에 의한 창조’로 확장한다. 이는 위 그래프의 Ⓒ를 넘어서는 것으로 향후 스스로 사고하는 AI가 구현되는 시점이 올 경우 ‘창조의 권능을 지닌 AI’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산업혁명기부터 현대 사회를 이끌어가는 서구 사회의 기반에는 기독교가 존재한다. 기독교는 타 종교와 달리 유일신을 내세우며, 그에게 창조의 권능을 부여함으로써 신으로의 권위를 공고히 한다. 한편 인간은 AI를 통해 신의 ‘창조의 권능’에 도전하고 있다. 이는 AI 이슈의 고전인 「프랑켄슈타인」에서도 나타난다. 작품 속 ‘괴물’은 창조주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 “나는 당신의 아담The Adam of your labour이건만 아무런 죄도 없이 당신에 의해 기쁨에서 쫓겨나 타락한 천사가 되었소.”(Mary Shelley 126)라고 말하며 마침내 인류에게 부여된 창조의 권능을 강조한다.
AI를 창조하며 조물주로 발돋움하는 인류에게, 에이리언 시리즈의 AI ‘David’는 새로운 메시지를 던진다. 바로 ‘AI 역시 언젠가 또 다른 창조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의 위치에 도전하는 인류와 같이, 창조주가 된 AI는 그들의 조물주인 인류의 뜻에 동참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인류와 AI의 관계를 역으로 조명해보는 것으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으로 인식하는 인류에게 있어 우리를 창조한, 혹은 진화의 과정에 관여한 ‘초월적 존재Supreme being’가 있음을 가정하자. 우리는 창조주를 대면했을 때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 Prometheus(2012) 속 창조주로의 인간(Charlie Holloway)과 피조물로의 AI(David)의 대화를 통해 그러한 상황을 약간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영화 속 대사이다.
Charlie Holloway: What we hoped to achieve was to meet our makers. To get answers. Why they even made us in the first place.
David: Why do you think your people made me?
Charlie Holloway: We made you because we could.
David: Can you imagine how disappointing it would be for you to hear the same thing from your creator?
영화는 우리의 상상력을 영상화하여 과학 기술에 대한 공론장을 형성한다. 근 반세기를 이어온 에이리언 시리즈는 디스토피아적 설정으로 출발하여 선한 의지를 지닌 AI의 묘사로, 그리고 창조주가 되어 인류를 멸종시키려는 AI를 보여주며 우리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했다. 물론 인류의 기술력이 그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피조물의 껍질에서 벗어나 창조주로 나아가는 단계에 있는 지금이 어쩌면 인류라는 종의 존폐를 결정짓는 선택의 순간일 수도 있음을 논의할 필요성을 제시한다. 서머싯 모움은 「인간의 굴레에서」를 통해 ‘자신이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너무 늦어서야 발견하는 것이야 말로 가혹한 것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창조주로 나아가는 것은 장밋빛 미래가 아닌 창조주의 굴레에 속박되는 것일 수 있음을 우리는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 나가야 할 것이다.
Mary Shelley, 프랑켄슈타인, 임종기 역(문예출판사, 2008)
Ridley Scott, Alien (1979)
James Cameron, Aliens (1986)
David Fincher, Alien3 (1992)
Jean-Pierre Jeunet, Alien Resurrection (1997)
Ridley Scott, Prometheus (2012)
Ridley Scott, Alien: Covenant (2017)
신순철. “사이버 문화와 인간 개념의 변화”. Speech & Communication 7. (2007)
홍성욱. 머니투데이, 2017. 6.24 <http://news.mt.co.kr/mtview.php?no=2017062108193724926>
[1] IMDb.com : IMDB Top Rating Sci-Fi Titles, non-animated film about A.I. / 시리즈는 첫 작품의 연도만 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