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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Sep 16. 2019

Episode 1.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올립니다. 요즘 글을 쓰는 일에 대한 권태기가 왔어요. 호주 여행 시리즈만큼은 꼭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의욕이 없네요.. 결국 새로운 글을 쓰는 건 잠시 보류하고 새로운 시리즈를 만들기로 했어요. 사실 오래전에 써 둔 글이고 여행은 그 보다도 한참 전입니다만.. 적당한 사진도 없이 일단 남겨봅니다(사진에는 아무래도 소질이 없어요... 슬퍼요).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엄마 나 일 그만두고 잠깐 캐나다에 다녀올래.”

“…. 또?”


졸업한지는 2년이 조금 넘었지만 이미 세 번째 사직이었다. 몇 년 동안 승무원이 되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해보았지만 실패만 경험해야 했던 2014년도 늦가을, 나는 잘 다니고 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밴쿠버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한 달간의 짧은 일정이었다. 명목은 ‘한 달간 영어공부를 하고 오겠다’였지만 실제로 나는 탈출구가 필요했다. 잠깐이라도 새로운 환경에서 공부도 하고 여행도 하다 보면 다시 새롭게 출발할 힘이 날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었을까? 외국 항공사 승무원이 되겠다는 너무나도 간절하고 확실한 목표 때문에 다른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입에 풀칠은 해야 했기에 동네 영어 학원을 전전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지만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는 나 자신을 원망도 많이 했다. 왜 굳이 헛된 꿈을 꿔서 나를 괴롭히는 걸까?라고 말이다. 친구들만 봐도 다들 적당한 직장에 잘 다니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없는 나. 돈도 없고 경력도 없었던 그때의 나는 지금이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뭐라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꿈을 포기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간의 도피와도 같은 밴쿠버 생활이 시작되었다. 



내가 한 달 동안 묵었던 숙소는 ‘한인 민박’이었다. 다운타운에서 트레인으로 20분 정도 떨어진 동네에 있는 낡은 2층짜리 집이었다. 1층에 3개 2층에 3개 정도 되는 방이 있었고 부엌과 화장실을 셰어 하는 구조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식사와 청소 등을 제공받는 홈스테이에서 생활하지만 최대한 비용을 절약해야 했던 나는 민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내 방은 그 오래된 민박 집안에서도 가장 작은 방이었다. 싱글 침대가 겨우 들어가는 아주 작은 방이었다. 침대 옆에는 책상이 있었는데 심지어 세로로 놓여 있었고 의자도 따로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으면 그게 책상 의자가 되는 구조였다. 


책상 아래에는 작은 라디에이터가 있었다. 외국에는 우리나라 보일러 같은 난방 시설은 따로 없기 때문에 그 라디에이터에 의지해서 생활해야 했다. 하지만 워낙 방이 작아서 그랬을까? 그 라디에이터 하나로도 충분히 방이 따뜻했다. 


방에는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다. 학교에 가있는 동안에는 항상 창문을 열어 두었다. 그렇게 해야 겨우 이 작은방을 환기시킬 수 있었다. 대학교 때 친구가 살던 고시원이 딱 이만한 크기였을 거다. 답답한 공간이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고 집에 오면 과제를 하거나 잠만 잤기 때문에 큰 불편함은 느끼지 못했다. 


홈스테이에 묵는 친구들은 집주인(보통 홈스테이 맘이라고 부른다)이 챙겨주는 점심 도시락을 가져왔다. 나는 처음 하루 이틀은 학교 근처에 있는 ‘팀 홀튼’(캐나다의 대중적인 카페)에서 1~2달러 정도 하는 도넛을 사다가 점심을 해결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빵으로만 점심을 먹는 게 힘들어졌다. 그래서 도시락을 싸 보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내가 묵었던 민박집에서는 밥이 무제한으로 제공되었다. 언제나 전기밥솥 가득 밥이 있었다. 내가 준비해야 할 것은 같이 먹을 반찬들. 계란 프라이나 햄 같은 간단한 반찬들로 준비해보려고 프라이팬을 꺼냈는데 코팅은 다 벗겨져있고 몇 년은 아무도 닦지 않은 듯 기름때가 가득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거쳐가는 민박집이나 보니 멀쩡한 식기류가 없었다. 


그래도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나는 플라스틱으로 된 용기를 여러 개 구입했다. 그리고 그 안에 밥, 생햄, 생계란을 넣었다. 그리고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뭐든 요리가 되어 나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2분 30초를 기다렸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퍽퍽하긴 했지만 계란도 잘 익었고 햄도 기대 이상으로 잘 요리되었다. 점점 노하우가 생긴 나는 냉동 미트볼이나 야채 같은 것들로 도시락을 싸기도 했다. 다른 도구 전혀 없이 오직 플라스틱 용기와 전자레인지 만으로만 요리했다. 아침 일찍 스스로 도시락을 준비해야 했던 나에게는 안성맞춤인 조리법이었다. 


그때 구입했던 플라스틱 용기는 나에게 유일한 식기였다. 아침에는 그 플라스틱 용기에 시리얼을 먹었다. 그리고는 깨끗이 씻어서 점심 도시락 용기로 썼다. 저녁때는 샐러드나 밥을 먹는 용도로 썼다. 불편하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불만스럽지는 않았다. 어차피 한 달 간만 이렇게 생활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 아거였으니 말이다. 이 정도 불편쯤이야. 




24인치 캐리어에 넣을 수 있는 겨울옷은 많지 않았다. 매일 입고 싶은 옷으로 바꿔 입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 최대한 따뜻하게 입을 수 있는 옷, 강의 실습할 때 입을 단정한 옷 한 벌 등 상황에 맞는 옷 한 두벌 정도로만 짐을 꾸렸다. 가방은 책을 넣어서 다닐 수 있는 편하고 가벼운 것으로 하나만 들고 왔다. 매일 비슷한 옷을 입고 다녀야 했지만 전혀 지겹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때 당시 나에게 중요한 건 주변의 시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참 주변을 많이 의식했던 나였다. 사실 영어 강사라는 일은 나쁘지 않은 직업이다. 나름의 스트레스가 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자체가 보람되기도 하고 계속 나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그때 당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는 이유여서 인지 당당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거나 오랜만에 동창을 만났을 때, 혹은 잘 나가는 대학 동기들을 만났을 때 나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밴쿠버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누구도 나를 몰랐고 내 상황을 몰랐고, 중요한 건 오직 그 날 그 날 듣는 수업이었다. 함께 어울려 다니던 일본인, 멕시코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주어진 수업과 과제를 마치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인 하루하루였다. 


그래서 였는지 맑은 하늘, 길거리에 가득한 붉은 단풍나무만 봐도 소소한 행복이 밀려왔다. 추운 날 호호 불며 마시던 따뜻한 커피 한잔, 달콤한 허니 도넛, 밤이 되면 빛을 발하는 개스 타운의 조명들, 그리고 하루 종일 은은하게 퍼지는 상큼하고 달달한 바디로션 냄새… 한국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것들인데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여기서는 민감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그냥 이렇게 살면 되는 거 아닌가?’

꿈, 직장, 돈… 그런 게 무슨 소용일까. 전부 행복하기 위해서 얻으려고 하는 건데. 사실 나는 추운 겨울날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잔에도 행복을 느끼는 사람인데, 왜 그렇게 무언가를 얻으려고 아까운 청춘을 전쟁처럼 살았던 것일까? 내가 손에 꽉 쥐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꿈을 이룬다는 것이 꼭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은 꿈을 이루지 못해 불행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만 쳐다보며 한량처럼 살 수는 없겠지. 한국에 돌아가면 또 다른 무언가를 다시 시작해야 할 테니까. 그것이 쉬울 거라는 보장도 없고. 


그래도 이제는 알았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것 말이다. 








P.S 이 한 달간의 캐나다 여행 후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저는 승무원 면접에 최종 합격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5년 차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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