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싸기로 유명한 승무원학원도 몇 군데나 등록해서 다니고 서류용 증명사진은 또 몇 장이나 다시 찍고 또 찍었는지..
수입도 안 좋았던 시기였는데 면접 때마다 전문샵에서 헤어 메이크업을 받았다.
무려 한 번에 6만 원을 내면서 말이다.
밥벌이를 위해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일을 했다.
학원일은 보통 아이들이 하교 한 다음인 2-3시부터 시작된다.
안양에 사는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한 시간 반 걸리는 강남으로 가서 승무원 취업 스터디를 하고 대충 점심을 해결 한 후 안산에 있는 학원으로 다시 출근했다.
일만 하는 것도 힘든데 게으른 내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아무리 돌아봐도 아 내가 정말 너~무 이 일이 하고 싶었었구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3년 이상 면접에서 떨어지고 슬슬 포기라는 단어가 생각날 때쯤 나는 지금 항공사에 최종 합격했다.
다른 항공사 시험을 볼 때는 한 단계 한 단계 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렇게 안 풀리기가 있나 싶었는데,
막상 우리 항공사 면접을 볼 때는 모든 게 나를 위해 준비된 듯 처음부터 끝까지 순조로웠다.
최종 면접을 본 지 10일 만에 합격 안내를 받았는데, 그 때 정말 서럽게 울었다.
"나 합격했어엉엉엉엉!!ㅠㅠㅠㅠ"
아마 그때의 감격은 평생 기억할 거 같다.
지난 5년간 정말 행복하게 비행했다.
물론 승객들 때문에, 함께 일하는 크루들 때문에 이런저런 상황 때문에 화가 나고 짜증 났던 날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래도 정말 대부분의 날들은 행복했다.
처음 1년은 내가 승무원이라는 사실 자체가 감격스러웠고, 그 이후에는 여행하는 맛에 일했다.
그 후에는 좋은 회사 덕분에 만족하며 일했는데 이 동네에서는 '꿀 직장'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우리 회사는 승무원들이 일하기 좋은 환경으로 유명하다.
최근 몇 개월은 비행 권태기가 와서 힘들었는데, 이 '직업'은 포기해도 '직장'은 포기 못하겠다는 게 내 결론이었다.
두바이에 살면서 좋은 사람들은 또 어찌나 많이 만났는지.. 외국에서 살고 있지만 외롭다고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부족하지 않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부족함은 무슨.. 차고 넘치는 삶이라고 생각했지.
승무원만 되면 모든 게 끝나는 줄 알았다.
승무원 준비생뿐만 아니라 모든 취준생이 그런 마음이었겠지?
일단은 되기만 한다면.. 되기만 한다면.. 하고 간절하게 바라다가 막상 되고 보니 '그다음은?'을 생각하게 되는 것.
난 외국에 살고 싶었고, 전공을 살려 영어를 쓰는 일을 하고 싶었고, 여행을 실컷 하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외국항공사 승무원만 한 직업이 없었다.
그렇게 승무원이 되고 싶었는데도 난 한번도 승무원이 결국 일터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서비스.
겪고 보니 난 서비스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더라고.
승객들이 툭툭 던지고 가는 불만 섞인 이야기에 크게 상처를 받고 며칠 동안 심지어 몇 개월 몇 년 동안
이나 되뇌는 일도 종종 있었다.
연차가 쌓이면서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을 대하는 것은 어렵다.
난 항상 회사가 상황에 대처하는 디테일한 지침을 내주길 바랬다.
예를 들어, ' 담요를 달라고 컴플레인하는 경우(우리 회사는 LCC이기 때문에 담요를 무료로 제공하지 않음)에는 이렇게 이렇게 대답하세요. 그래도 컴플레인하는 경우는 어떻게 어떻게 하세요.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는 저렇게 저렇게 하세요. 그래도 안되면....' 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회사가 그럴 이유는 없다.
물론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은 있지만 여튼 회사는 크루가 예상치 못한 경우에 알아서 "잘" 대처하길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면접 시 서비스 경력을 보고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보고 위기 대처 능력을 보는거 아니겠나?
한국 사람들이야 워낙 룰을 잘 따르는 편이니 지난 5년 동안 아무 이슈없이 나름 잘 다니긴 했지만, 여튼 그런 이유로 서비스직에서 일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이제는 결국,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더 나아갈 곳이 없어 보이는 내 자리도,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기엔 제약이 많은 외국 생활도..
20대의 내 꿈이 승무원이 되는 것이었다면 30대의 내 꿈은 60대에도 일하는 것이다.
60에도 70에도,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기왕이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전문성이 생기는 일이었으면 좋겠다.
나이가 들면 알아서 빠져줘야 하는 일이 아니라,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일.
그런 일을 찾았으면 좋겠다.
더 공부해야 한대도 괜찮고 큰돈을 벌지 않아도 정말 정말 괜찮다.
가만히 자리에 있으면 정말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직업이고 직장이지만 왠지 이제는 내려놓고 다시 출발선에 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혼자 생각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요만큼의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