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들을 마음이 있는 이에게 하는 것이다.
난 점쟁이는 아니다. 당연히 예지력이란 것이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앞날이 훤히 보이는 분야가 있다. 물론 단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나 쉬이 변하지 않는 인간의 성향상 갈 길은 빤하다. 해서 얼추 밑그림이 그려지는 이유이다.
자녀의 가스라이팅에 놀아나는 부모는 의외로 많다. 눈물과 투정 뒤에 숨겨진 내막을 알아채지 못하는 부모라면 아이 손에 놀아나기 십상이다.
며칠 전 학부모 공개수업이 있었다. 부모 입장에서 수업참관은 수업을 보기 위함보다 내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학습을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크다. 이런 이유로 평소에 하지도 않던 발표 비중이 높은 수업을 전개했다.
마음을 담는 글쓰기 발표였고 글은 수업 전 사흘에 걸쳐 쓰도록 했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짧은 글보다 어떤 사건을 통해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꼈는지 당시 상황을 떠올려 상세히 기술하라 했다. 단순한 행동 나열을 벗어나 어떤 감정이 들었을지도 함께 써보라 했다. 당연히 초2 수준에서는 정말 어려울 수 있는 글쓰기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학습이란 깊은 사고를 통해 한 단계 성장하는 것이기에 매우 구체적인 사례를 수없이 들어주며 아이들 쓰기를 독려했다. 몇 명의 아이는 내가 기대한 바를 충족하는 수준의 글로 서서히 나아가고 있었다.
언급하고자 하는 이 녀석은 절대 머리가 나쁘지 않다. 문제는 조금 힘들다 싶으면 회피하는 잔꾀를 낸다는 점이다. 물론 내게 그런 잔머리가 통하지 않으니 자신의 양육자를 가스라이팅 해버렸다. 울고 짜증 내며 글이 잘 안 써지니 내일 학부모 공개수업에 오지 않으면 안 되냐 해버린 것이다. 이 녀석은 글을 쓰는 며칠 내내 그다지 열심히 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수업당일 오전 학부모는 자신의 아이는 발표를 시키지 말아 달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 꼬맹이의 가스라이팅이 정확하게 계획한 데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것이 비단 이번 한 번으로 끝날 리 없다. 이 녀석은 앞으로도 불편할 때마다 자신의 양육자를 가스라이팅 할 것이다. 더 치밀하고 정교화된 방식으로 부모를 자신의 필요에 맞게 조정하게 됨은 뻔한 일이다.
이런 일들이 처음이 아니기에 익숙하다. 또한 그런 아이들이 어찌 자랐음도 전해 들었기에 미래가 그려진다. 이런 패턴의 아이들은 난이도가 월등히 높아지는 중고등 학교에서도 동일한 짓거리를 반복한다. 귀찮다고 수행평가를 건너뛰니 성적은 좋을 리 없다. 걸핏하면 도망칠 생각부터 하다 보니 결국 학교를 자퇴한다. 겨우 졸업을 한다 해도 온전한 직장생활을 못한다. 정시출근과 정시퇴근조차도 힘드니 말이다. 돈이 필요하면 잠깐 알바 뛰고 몇만 원 손에 쥐면 흥청망청 소진할 때까지 쉰다.
내가 그린 이 꼬맹이의 미래도 앞서 겪은 녀석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 싶다. 이렇게 진행되면 안 됨을 알지만, 입은 닫는다. 이런 부류 아이들의 양육자는 내가 하는 말을 들을 의지가 없다. 문제가 생겨 고심을 한다면 분명 내게 먼저 고민을 털어놓았을 테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간주하며 손쉽게 내게 메시지를 통해 이렇게 하겠노라 통보하니 말이다. 부모의 뜻이 그러하니 나 또한 알겠다고 답신할 수밖에 없었다.
주제넘게 내가 이런 행동에 대해 언급하면 내 아이를 싫어한다 오해한다. 그 불씨는 분명 나를 향한 칼이 됨을 난 모르지 않는다.
지난 25년 겪은 다채로운 녀석들에 대한 경험치가 내게 남아 있다. 새로운 녀석들의 데이터가 과거 아이들과 오버랩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선입견이 생길까 싶어 조심하기도 하지만 그럴 수 있겠다는 예측이 그리 흘러가는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들을 마음이 없으니 말할 수 없을 뿐이다. 난 누군가의 삶에 방향성을 제시할 자격이나 권리가 있는 자가 아니다. 그건 명백한 오지랖이다. 난 가르칠 것을 충실히 이행하면 족하다. 이 단순한 이치를 몰라 한참을 갈등만 유발했지 싶다.
듣기 좋은 소리만 원하기에 그리 말해주니 잔잔한 것을 이제야 알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