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상처가 됨을 해하는 자는 정말 모를까?'
초기에는 궁금했다. 그리고 이제는 알았다. 지켜봐 온 바로는 이건 안다&모른다의 문제가 아니란 사실을 말이다.
이런 부류들은 애초 상대에 관심이 없다. 자신의 감정만 소중하기에 좋을 때는 친한 척을 하다가 분노를 쏟아낼 때는 가면을 바꿔버린다. 내 감정 쓰레기만 분출하면 그만이기에 애초부터 상대의 상처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진상이 되어있음을 모른다. 주위 시선이 달라지거나 비난이 쇠도하면 스스로의 억울함만 토로할 뿐이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기보다 또 다른 만만한 대상을 물색하여 행해오던 만행을 되풀이한다.
학교는 그런 대상 중에서 가장 만만한 곳이다. 아동학대라는 막을 수 없는 칼이 있고 무고죄가 절대 성립하지 않는 완벽한 방패도 있다. 칼과 방패를 양손에 쥐었으니 거칠 것이 없다.
그래서 학교로 향하는 악성 민원은 끊임이 없다.
학생에게 문제가 많다 한다. 이웃한 후배 교사가 고민을 털어놓으면 들어주고는 있으나 뭔가 바꾸려 시도하는 스탠스를 취할 계획이라면 말린다. 리틀 진상이 살아온 9년을 일순간에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과 행여나 양육자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한다면 포기하라 한다. 그 아이는 부모란 거울을 보고 자랐으니 별반 도움 될 것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라며 말이다.
25년 경험을 통해 자녀에 대한 교사의 지적을 일부 양육자들은 싫어함으로 받아들임을 안다. 이런 오해가 실타래가 되어버리면 진상의 모태께서는 어떻게 교사를 괴롭힐지 머리란 것을 쓰기 시작한다. 작은 트집을 잡아 결국 조리돌림하듯 일을 키우는 수법을 자행한다.
누군가를 해하는 양육자의 행위가 용인됨을 보고 자랐기에 그들의 자녀는 같은 공간에 있는 만만한 대상을 탐색하고 해함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해하는 짓거리에 도취되어 있을 때는 무엇이 문제인지 정말 모르는 표정을 하다가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었다 싶으면 억울하다 난리를 치는 것은 다반사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진상 새싹을 보고 있을 때마다 창문을 열고 한숨을 내쉴 뿐이다. 신께서도 바꾸지 못하는 진상을 한낱 인간인 내가 어찌할 수 있을까!
담임교사를 6번 바뀌게 만들고 이제는 그 누구도 담임을 맡지 않겠다하여 공석이 되어버린 방송을 보고 있으니 더 착잡해진다. 내가 과연 얼마나 교사란 직을 버틸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