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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에 Jan 02. 2022

인정

의미없음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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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2021년에는 내 삶을 통틀어 남부럽지 않게 일하고 바쁘게 살았던 한해였다. 성취도 있었으나 그만큼 생채기도 많았던 한해였다. 가장 대표적으로 자아가 약해진 것. 일을 시작한 이후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허겁지겁 처리하기 바쁜 일상을 지내고 여유가 생겨 나를 돌아보면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폐허가 되어 버린 내 삶을 발견한다. 정리되지 않은 집과 방, 세탁을 맡기지 못한 옷가지, 헛헛한 마음, 좋아하는 것들을 즐길수 없게 되어버린 무감각함. 3개월 정도의 프로젝트에 온 정신을 쏟아붓다가 엉망이 되어버린 내 삶을 마주할 때마다 '아, 어쩌지, 어디부터 정리해야하지, 일단 여기만 치워보자' 라고 되뇌이며 주섬주섬 마음과 내 공간의 폐허를 주어담는다. 하지만 다시 또 일의 쓰나미가 몰아치고 사적인 해프닝들이 벌어져 다시 모든 것을 헤집어놓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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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릴적부터 정리를 굉장히 싫어했다. 그건 정리의 기쁨은 잠시이고 다시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 때문인데 무너진 것을 다시 쌓아올리는 무의미한 반복이 싫었던 것 같다. 정리할 시간에 더 의미있는 무언가를 찾으러 떠나고 싶기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래서 일상의 무너짐과 쌓아올림을 반복하는 과정이 지루하고, 굉장히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여 '나는 왜 이러지. 이 일에 의미가 있을까. 더 나은 내가 되라는 시련인걸까' 라고 자조하고 한탄해왔던 것 같다. 지나간 일년 동안에는 이 무의미한 반복이 무엇인지 드디어 들여다볼 용기가 생겼더랬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무의미한 반복을 받아들이기로 겨우 마음 먹게된 한해였다. 내게 벌어지는 무수한 외부적 자극에 의미 부여하고 지나간 내 삶과의 인과를 찾는 일을 나는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의식적으로 그 인과와 합리성을 끊어내려고 노력했던 시기였다 -물론 아직도 잘 되진 않는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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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로 넘어가는 새벽 방에 덩그러니 누워 지금보다  현재의 감각에 집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새해의 다짐은 이것이다. 본래 감각에 조금 무던한 편이고, 지나간 감각을 곱씹어보는 성향은 더더욱 아닌  같아서 기쁜일에도  무덤덤하게 반응하곤 했다. 그럼에도 특정 상처는 오래오래 기억하는 편인데, 그건 굳이 애써 기억하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상처의 기억과 고통은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었다. 흔적을 바라보며 나는 계속 인과의 끈을 찾는다. 안타깝게도 기쁨은 상처를 남기지 않으니  빠르게 휘발되어 버렸다. 이게 내가 맞닿뜨린 함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반대로 했어야 했던  아닐까? 정답은 없겠지만 반대로 살아봐야 겠다는 다짐은 하게되었다. 그래서 애를써서 좋은 현재의 감각은 극대화하여 느끼고, 기록하고, 오래오래 곱씹어보기도 마음 먹어 본다. 그리고 가끔씩 생채기를 내는 외부의 자극은 툭툭 가볍게 털어내기로 해본다. 딱히 이유없이 내게 일어난 일에 '왜'라고 질문하기보다 '어떻게' 이 일을 털어내고 나아가야할지에 집중해보고자 한다. 왜냐고 물어봐야, 그냥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을거니까. 설령 이유가 있더래도 그걸 나는 평생 알수 없을테니까. 그리하여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무의미의 축복(?) 온몸으로 받아들여보고자 한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무심히 지나쳤던 문단이 떠오른다. , 이런의미였구나, 라고 무릎을 치게된다.


부정적인 경험을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우리를 고양시키기 위한 교화적인 ‘시련이라든가, 우리의 과오에 대한 징벌이라든가, 인간을 고도로 이해하기 위한 교훈이라든가. 사회제도의 모순으로 인한 결과라는 식으로 합리성으로 봉합하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자신이 받은 상처나 손해가 완전히 ‘무의미’ 하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스템의 결함’이든 ‘트라우마’든 ‘미처 태어나지 못한 태아의 앙화’ 든 상관없으니까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이 그 나름의 인과관계에서 기인한 ‘합리적’ 사건이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마음을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생각하면 누구든 알 수 있겟지만, 우리를 상처입히고 훼손하는 ‘사악한 것’의 대부분에는 손톱만큼도 교화의 요소나 징벌의 요소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어떤 필연성도 없이 우리를 찾아와 마치 농담처럼 아무 목적도 없이 그저 상처 입히고 훼손하기 위해 우리를 상처입고 훼손하는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악한 것’에 의해 무의미하게 상처 입고 훼손당하는 경험을 담담하게 기술하면서 거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는 것을 반복적으로 집요하게 써왔습니다.

(우치다 다쓰루,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내년에 나를 뒤돌아봤을 때에는 조금이나다 무의미 속에서 기쁨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온 감각으로 느꼈던 일들을,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더 즐겁게 떠들 수 있기를. 더 생기넘치는 글을 쓸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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