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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에 Jun 12. 2022

응답하라 2008

리만브라더스의 날개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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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1일. 특정한 날짜는 뇌리에 선명하게 기억된다. 6년전의 오늘은 내 생애 첫 출근 날이었다. 누군들 설레지 않겠느냐마는, 나는 더 불안하고 더 설레여했다. 취업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서울로 홀로 상경하여 나라는 사람이 스스로 밥벌이를하며 홀로 설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까지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2008년 리먼 파산 이후 찾아온 미국발 금융위기, 연이어 발생한 유로존 위기와 같은 경제적 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대학생활을 즐기며 낭만을 좇기 바빳던 대학생은, '졸업하면 대기업은 그냥 들어가, 야, 놀아. 하고싶은 거 다 도전해' 라는 당시 학교에 만개했던 낙관주의에 가볍게 편승했다. 그래서 아주 논 것은 아니었으나 누구나 한번쯤 시도해본다는 고시생활도 약 2년 정도 해보고, 휴학하고 인턴십으로 번 쌈짓돈으로 장기 유럽 배낭여행도 가보았다. 만개한 벚꽃 아래에서 술도 홀짝여보고 실연에 아파 신촌바닥을 뒹구르르 구르기도 했다. 평범한 대학생활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뀐걸 눈치채지 못했었다. 신림동 고시생활 동안 경제학 공부를 했음에도 역설적이게도 현실의 경제에는 무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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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낙방끝에 돌아온 대학은 이전의 대학이 아니었다. 중앙동아리보다는 직무 연관성이 높은 학회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았고, 나는 유럽배낭여향 돈벌러 했었던 인턴십은 취업과 직결되는 치열한 경쟁의 자리였다. 취업시장이 얼어붙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연결된 글로벌 경제, 특히 거시 경제의 여파가 마이크로한 개인의 삶과 선호체계에 영향을 미치는데 약 3-4년의 timegap이 존재했던 것 같다. 내가 느렸을 수도 있으나 적어도 나는 그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피부로 다름을 느꼈다. 소위 명문대 나오면 나머지 인생은 술술 풀린다는 공식은 더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선배들때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때는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첫 세대였다. 취업하지 못한채 졸업하였기 때문에 부끄러워 졸업식에 나오지 않는 동기도 있었고, 언제까지 목매달 순 없으니 5급이 아닌 7급 공무원, 나아가 9급 공무원까지 준비한다는 동기들도 있었다. 이와중에 당시 인기였던 대기업, 금융공기업에 합격하여 SNS에 훈장처럼 자랑하던 이도 있었다. 취업설명회에서 이름을 적어가면 서류 합격은 당연했던 선배들의 이야기는 거짓말같다고 느끼던 꿈같은 시간들이었다. 지금이야 너무 당연했던 모습이지만 캠퍼스 낭만을 꿈꾸며 입학한 08학번이 대거 졸업할 2014년 졸업식 무렵의 풍경은 희비가 교차하는 씁쓸한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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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가 길었는데, 나는 그것보다도 더 늦은 2016년 2월에 졸업했다. 자그마치 8년만에 학생에서 벗어났다. 그것도 미취업(Unemployed) 상태로. 당시 어느 외국계 회사의 재무팀에서 인턴 업무를 하다가 졸업식에만 간신히 참가했다. 같은 학교 졸업생인 오빠도 그시절 무직상태였다. 장기간 언론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구에서 부모님이 올라오셨으나 졸업식 풍경이 그리 밝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늦깍이 졸업생, 그러나 그것이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내 대학생활의 상태표였던 것이 스스로도 싫었다. 부모님이 상경을 반대했음에도, 서울에서 이루고 싶었던 꿈이 있다 외치며 뛰쳐나가 청운을 꿈꾸었지만 중간 평가지는 그러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무슨 꿈을 꾸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 시절은 특히 부모님과도 많이 싸웠고 친구들과도 어색했던 시절이었다. 무언가는 해야했기에 비정규직 상태를 전전했다. 그리고 그 비정규직의 종착지가 첫 회사의 인턴자리였다. 이렇게 첫 인연을 맺는 첫 회사는 한 때 경영/경제학을 전공한 자라면 가고싶어했던 컨설팅회사였다. 첫 번째 프로젝트는 지방은행 중장기 전략 프로젝트였는데, 밤도 많이 새고 팀원들과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다고 생각한 업무였다. 한때나도 이 업에 대한 선망이 있었던터라 또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정규직으로 전환하여 생애 첫 정규직자리를 얻게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장장 6년에 걸쳐 무수한 감정적 롤러코스터를 겪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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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쓰고 끝날 것이라 생각한 첫 직장 첫 이별에 대한 이야기는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아 나눠 쓰기로 결정하였다. 무수히 언어로 표현했다고 생각한 애증의 첫 직업이었건만 내 마음속에 여전히 많은 생각이 누적되어있나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만, 첫 직업으로 컨설팅 회사를 택한 것, 그 중에서도 전략을 택한 것은 앞으로의 밥벌이를 함에 있어 유의미한 경험이라 말할 수 있다. 지옥같았던 프로젝트도 끝은 있었고, 견디기 힘들었던 사람도 결국은 지나갈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동고동락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남겼다. 누군가들은 컨설팅에서는 다른 회사보다 2배 빨리 일을 배운다고 하던데, 그럴만도 한 것이 2배 많은 시간을 일했기 때문에, 아니 3배가까이 많이 일했기 때문에 어찌보면 그저 당연한 명제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많이 일한 것을 훈장처럼 여기지는 않는다. 업계에 있으면서 쉽게 범하는 오류는 특정 프로젝트에서의 고생이 영웅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앞서 말한 얻은 것의 이면에 나는 많은 것을 잃었다. 그리고 이 업을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에는 더 이상 지속하다가는 잃은 것들을 영영 회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때문이었다. 사실 이 퇴사를 앞둔 22년 4월 11일 당일에 썼으나, 결론을 내리기 어려워 덮어둔 것을 2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 펼쳐보게 되었는데 그 직감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은 시간 일했고 단기간에 공부했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더 무지한 사람이 직업인으로서의 나였다. 이게 업의 특성이 아니라 그냥 나라는 사람의 기질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떠나온 후 마주하게 되는 것들은 이전과는 다른 경험이라 느낀다. 같은 업에 갇혀 있었더라면 느끼지 못했을 경험과 감정, 그리고 잃어버릴 뻔 한 것들을 되찾는 지금의 이 순간이 기쁘고 소중하다.


아무튼 직업과의 첫 이별을 겪으며 나는 누구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추구하는 인생의 방향성, 일과 직업에 대한 가치관, 그리고 일과 삶의 균형같은 묵직한 주제는 여전히 고민해야 할 숙제인 것 같다. 밥벌이는 계속되고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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