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로에 Jan 26. 2020

기억과 데이터

Remember me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장 분위기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호상까지는 아니었지만 함께 늙어가고 있던 처지의 어른들의 눈엔 큰 병치레 없이 생을 마감한 것에, 고통이 적어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지배적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할머니의 네 명의 아들들은 이따금씩 눈물을 훔치셨고, 나는 물 흐르듯 진행되는 일련의 장례 절차와 순간순간 포착되는 슬픔과 그리움의 감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께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보름 전, 길에서 미끄러져 병원으로 실려가셨고 그렇게 딱 15일 동안 누구도 도울 길 없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투쟁을 시작하셨다. 주말에 잡힌 몇몇 약속을 취소하고 위독한 할머니를 뵙기 위해 포항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중환자실에서 뵌 할머니는 내가 기억하던 할머니보다 더 작아지셨고 더 앙상했다. 의식은 거의 없으셨지만 아빠가 "손녀딸이 왔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셨고, 장난스럽게 "손녀딸 이제 가라고 할까"라고 말하였을 때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목이 메었다. 나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빠와 삼촌들에게 읊조리는 중환자실 간호사의 몇몇 말을 귀동냥으로 들었다. 앞으로 혈압이 지속적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것, 할머니께서 의지로 버티고 계실 것이란 것, 지금 단계에서는 고통이란 것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란 것.


의학지식이 없던 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정보에 기대어 마치 산소가 거의 없는 밀실 속 촛불처럼 할머니의 생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다는 것을 유추했다. 노화와 죽음의 역학관계를 현재의 기술은 해결할 수 없으며 하물며 의술을 사용할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저 슬픔과 안타까움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무력감이 한 차례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얄궂게도 세 번째 정보에 감사해 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할머니가 느끼는 고통이 적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작은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을 목격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돌아오는 기차에서 툭, 툭, 떨어지는 눈물을 연신 닦아냈다. 그리고 내가 다녀가고 하루 이틀 사이 할머니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생을 조용히 마감하셨다.




비슷한 시기에 100살까지 살기 위해 동쪽의 바벨탑을 쌓고 하늘 길도 바꾸었다던 어느 대기업 창립자도 세상을 떠났다. 1922년생이었던 그는 끝끝내 백 년을 견디지 못했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한들 병과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속수무책이다. 영원히 살 수는 없는 걸까?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일까? 디즈니 영화 <코코>는 죽음과 상실에 관한 암울한 질문에 산뜻한 해답을 제시한다. 바로 후대의 '기억'이 죽은 이를 죽은 자의 세계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할 것이라는 상상이다. 실제로 멕시코에서는 이승과 사후 세계를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세계관으로 보았고 죽음이라는 것은 그저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영화 <코코>는 이에 더해 '기억'이라는 매개가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를 연결한다고 보았다. 때문에 생을 마감한 이를 소중히 여긴 사람들(비단 가족뿐만 아니라)이 남아있다면 사후 세계에서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상상에 나는 큰 위로를 받았다. 기술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인간의 마음 안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스스르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승에서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어지면 저승에서도 먼지처럼 사라져


코코의 가르침에 따라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할머니를 기억해내고자 애썼다. 1929년 생이었던 할머니는 92년의 생을 경주에서도 한참 외따로 떨어진 산골마을에서 평생 살아 내셨다. 정기적으로 찾아뵙긴 했지만 무뚝뚝한 경상도 여자들이라 잘 먹어라, 아프지 말아라, 건강해라 정도의 짧고 간결한 문장 말고는 긴 대화가 오간 적도 없다. 내가 아는 한 할머니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1929년이면 일제시대인데, 이후에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무수한 역사적 사건은 기억하면서 그 시간을 견뎌낸 할머니의 삶을 기억할 수 없어서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이따금 밀려드는 기억을 건져냈다. 낡은 시골집, 할머니의 논과 밭, 툭 하고 먹을 것을 던져주던 모습, 꼬부랑한 허리와 작은 몸으로 분주하게 쌀이며 고추며 야채를 한 움큼 정리하던 모습. 기억을 더듬어 가다 보면 나와 부모님이 할머니를 뵈러 갔을 때 정작 할머니는 잘 보이지 않았다. 헛간을 뒤지거나, 밭에 나가시거나, 옥상에 올라가 장독을 쓸어 담았다. 그때는 왜인지 잘 몰랐는데 다시금 생각해보니 며칠 후 떠날 자식과 손녀에게 줄 것을 잔뜩 챙기느라 분주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할머니가 챙겨주신 고추, 마늘, 시래기, 쌀, 포도 같은 먹을 것을 트렁크에 잔뜩 싣고 집으로 돌아왔고 우리 가족은 배부르게 먹었다. 그땐 그게 귀찮기도 했고 잘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았는데 트렁크에 잔뜩 실은 우리 집 식량이 할머니의 사랑이자 따뜻함이었다는 걸 나는 참 느리게도 알았다. 그리하여 비록 못난 손녀딸이라 할머니의 90년이 넘는 삶을 모두 회고할 수 없어도 따뜻했던 추억과 마지막 기억만은 잊지 않아 끝끝내 글을 쓰게 되었다. 할머니와의 기억을 다시 조립하고 기억해내어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해서. 그렇게 할머니의 존재와 생의 가치를 증명해내고 싶어서.




이 글은 구상을 하고 나서도 몇 번이나 다시 고쳐 쓴 글이다. 할머니와 죽음이라는 단어를 나란히 놓았을 때 그저 막연한 감정만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탐구하고자 시작한 이 공간에 나의 개인적 회고가 무슨 의미일까라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럼에도 한 글자, 한 글자 꾸역꾸역 써 내려갔다. 그리고 글을 마칠 때쯤 결론에 도달했다. 데이터는 사라지지만 인간의 기억은 생이 지속되는 한 영원할 것이란 것을.


컴퓨터가 기억하는 방식을 우리는 데이터라고 부른다. 내 기억과 감정의 일부인 이 글은 데이터화 되어 카카오 서버에 0과 1의 숫자로 변형되어 어딘가에 있을 카카오 데이터센터 혹은 클라우드 어딘가에 저장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 편으로 불안해할 것이다. 만약 데이터센터가 멈추면?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내 데이터는 다 날아가는 걸까? 그렇다면 내 기억의 일부도 사라지는 것일까? 하지만 할머니에 대한 나의 기억은 내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0과 1로 된 데이터가 날아가더라도 이 글을 적어내는 과정 동안 내가 건져낸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따뜻함은 내 몸 안에 어딘가에 둥실둥실 떠다닐 것이며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그것은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을 것임을.  


https://www.youtube.com/watch?v=pp2JuN5ENZ0


작가의 이전글 어느 거짓말쟁이의 고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