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그날의 실수
날씨가 추워지면 그 때가 생각난다. 그 기억을 온몸으로 거부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허허, 겨울이 오는구나 하며 너스레를 떠는 능청이 생겼다. 그렇다는 건 사회 초년생 딱지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일까. 영원히 햇병아리일 것만 같은 내게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그날의 실수를 글로 옮겨보고자 한다. 일종의 트라우마 극복이랄까.
20년 겨울, 떨리는 마음에 벌벌대며 들어간 행정실에서 만나뵙게 된 나의 첫 실장님은 내가 가진 모든 행운을 끌어다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좋은 분이셨다. 알맹이 없는 나의 질문을 나무라지 않으셨고, 내가 기죽을까봐 늘 따스하게 다독여주셨고, 나의 시보해제 날에는 집으로 케이크까지 보내주셨다(그날 받은 감동은 말로 다 할 수도 없다). 참으로 다정다감하셨던 실장님께 내가 해드린 보답은 오직 똥 치우기였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덜렁거렸고 더뎠다. 똥은 내가 싸고 치우는 건 늘 실장님인 일상이 반복되며 1년이 지났다.
mbti 검사를 하면 다른 건 변해도 앞자리만은 굳건했는데 나는 태생이 E형 인간이다. 외향적 게이지가 100프로 풀파워인 공격적 외향인은 아니지만 내 안의 E는 단 한번도 I에게 자리를 뺏겨본 적 없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렇듯 직장에서의 나는 완전히 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출근할 때 안녕하세요, 퇴근할 때 들어가세요 외에는 자발적으로 말을 뱉어본 적이 없는 극도의 내향인 모드로 직장 생활을 했다. 그 모드는 날이 갈수록 강화되었는데 나를 향한 기준이 늘 매섭고 날카로웠던 내가 거듭되는 크고 작은 실수에 점점 말수를 잃어갔기 때문이다. 실장님께서는 혼자 저지르고 혼자 기죽는 나를 일찍이 알아보시고 혹은 mbti가 iiii인 사람 마냥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내게 부담 주지 않기 위해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으셨다. 마음으로는 실장님과 점심이든 저녁이든 몇 끼라도 함께하고 싶었지만 스스로 미덥지 못한 직원이라는 생각이 실장님 앞에 선 나를 가로막았다. 실장님을 존경할수록 어째 나는 더 작아졌다.
시간이 약이라 했던가. 1년 여 정도의 경험치가 누적되니 잔실수가 줄어들고 이제 일 좀 늘었네, 하는 소리를 듣게 됐다. 퇴근 후 처리하지 못한 일을 떠올리며 집에서까지 업무가 연장되는 고단함이 없어졌다. 하지만 내가 일이 는 1년 동안 실장님은 천천히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하셨다. 인사 이동철이 다가온 것이다.
1월, 7월에 있는 정기 인사 시즌은 늘 빠르게 다가온다. 12월 말에 확정적으로 인사 이동 발표가 나면 1월 1일자로 소속이 바뀐다. 실장님의 이동이 결정나던 날, 시간의 흐름을 온몸으로 체감하니 마음이 시큰시큰했다. 실장님께 가르침에 대한 감사 인사나 부주의하던 시절에 대한 사과 말씀 한 마디 살갑게 못 드리고 떠나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 가자마자 작은 선물을 샀다. 요즘 배송은 하루 이틀이면 오지만 혹시나 재해, 재난으로 배송이 늦어지면 어째, 훼손된 제품이 오면 어째, 하며 부산스럽게 헤어질 결심을 했더랬다.
12월 31일. 행정실에 실장님과 둘만 남는 순간을 하루종일 기다렸다. 아마 그 날 내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꽤나 시끄러웠을 것이다. 어떻게 선물을 건네드리지, 어떤 말을 해야 하지, 하며 가시는 실장님보다 내가 더 긴장했다. 그리고 평소보다 일찍 가시게 된 실장님의 퇴근 무렵, 하얗게 질린 손으로 선물과 손편지를 실장님께 스윽 내밀었다.
"실장님, 이거 작지만 제가 준비한 선물입니다. 항상 부족하고 못 미더우셨을텐데 늘 따뜻하게 격려해주시는 실장님 덕에 자리를 잘 지킬 수 있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가셔도 꼭 행복한 일만 있으실 거예요." 따위의 멘트를 구구절절 준비했지만 뱉은 건 겨우 첫 한 마디였다. 실장님 책상 위에 종이 가방을 올려놓자마자 실장님의 눈시울이 붉어졌기 때문이다. 실장님의 그렁그렁한 눈을 보자마자 내 눈에도 훅 눈물이 차올라 으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자리로 튀어버렸다. 서로 얼굴도 마주하지 못한 채로 자리에서 각자 눈물을 닦아내며 안녕을 빌었다. 목끝까지 울음이 차올라 그 뒤론 말 한 마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눈물 섞인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실장님은 퇴근하셨고 그게 이별의 마침표인 줄만 알았다.
실장님 퇴근 후 1시간 정도가 끝났을까. 혹시 빠진 것 없는지 살펴보라는 차석 선생님 말씀에 시스템 화면을 눈으로 훑다가 뭐 하나가 턱 걸렸다. 당일 건수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관습적으로 익일 소급 결재를 하던 업무가 있었다. 12월 31일 미결재로 남은 문서가 눈에 딱 걸린 것이다. 12월 31일의 경우, 소급 결재를 하려면 1월로 넘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실제 12월 31일에 행정실의 장이었던 사람이 결재자로 찍히지 않고 1월에 오신 새로운 실장님이 12월 31일의 건에 대한 결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늘 익일 소급 결재를 하던 업무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겠거니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게 미결재 상태로 남아있는데 1월에 오신 새로운 실장님께서 결재해주시면 되겠죠?" 라고 선생님께 여쭤봤고 선생님은 몇 초 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몇 초 사이 등골이 서늘해지고 눈 앞이 아찔해졌다. 제발. 제발.
결국 실장님께 연락을 드렸다. 집에 도착하신 실장님께서는 알겠다며 댁에서 결재해주신다고 하셨고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상체는 부동의 자세, 하체는 한강에라도 빠진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는 자세로 벌을 섰다. 그리고 실장님의 문자가 도착했다. 집 컴퓨터가 이상해 결재가 안된다고, 지금 다시 출발하겠다고.
벽에 머리를 들이받고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게 다신 못 볼 것처럼 울면서 보내드렸는데 1시간 30분 후에 다시 뵙게 되다니. 그것도 내가 빠뜨린 결재 때문에. 죄송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아무것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는데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행정실 미닫이 문이 요란한 소릴 내며 열렸다. "이게 뭐야!" 웃으면서 들어온 실장님의 목소리에 벌떡 일어나 두 손 모아 싹싹 빌며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했다. 차석 선생님께서 "우리 쌤이 실장님 보고 싶어서 그새를 못 참았나보다~" 하며 농담을 던지셨고 실장님도 호탕하게 웃으셨지만 내 눈꼬리는 중력을 10배로 받는 듯 무한히 아래로 처졌다. 실장님은 나의 마지막 모습을 마지막까지 실수하던 애로 기억하시겠구나,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날 집에 가서 쓴 일기는 내 자신이 봐도 가련하다. 신년을 앞둔 들뜸이나 희망은 없고 빼곡하게 후회와 반성이 들어차 있다. 그 때의 실수와 과오를 되새기며 나는 점점 더 나아졌지만 죄송스러운 마음에 그 뒤로 제대로 된 연락 한번 못 드렸다. 그리고 내 인사 이동날, 실장님께서 먼저 연락을 주셔서 짧은 몇 마디를 나누었다. 그 때 죄송했다, 사실 제가 정말 존경했다 같은 말을 주책맞게 늘어놓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는 가장 드리고 싶은 말로 끝을 맺었다. '다음번에 만나게 되면 꼭 도움이 되는 구성원으로 가겠습니다.'. 존경하는 실장님. 진심으로 실장님의 행복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