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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슬 Oct 27. 2019

나는 밥 잘 먹고 쑥쑥 자라서 서어른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서른이 되는 게 싫어 죽겠다.

1991년에 태어난 나는 올 해가 지나면 서른이 된다. 의도치 않게 10년을 세 번이나 살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그런 건 모르겠고 얼굴에 깻가루만 한 기미가 몇 개 생긴 건 분명히 알겠다. 

나는 아직까지도 이토록 자기중심적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서른이 되는 게 싫어 죽겠다. 영원히 이십 대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이를 세는 셈법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가수 별이 부른 희대의 명곡 <12월 32일>의 가사처럼 막무가내로 우기고 싶다. 29.1 세라고, 29.2세라고, 29.3세라고...

내가 서른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만 서른을 미룰 수는 없을까. 물론 그 날은 영원히 오지 않겠지만.      


나는 언제부터 서른 되기를 꺼려했을까. 찬찬히 되짚어보니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열 살이 되기 전의 어느 날. 교실바닥에 친구들과 둘러앉아 놀고 있는데 어떤 애가 이런 질문을 했다.     

“너네는 몇 살 까지 살 거야?”     

나는 3초 정도 진지하게 생각한 후 대답했다.     

“스물아홉 살”     

왜냐는 질문에 너무 늙기 전에 죽고 싶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땐 서른을 넘긴 이슬이가 죽어 버린 이슬이보다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들도 스물아홉에 죽겠노라고, 같이 죽자고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시간이 흘러버렸고, 어린 이슬이가 죽기로 마음먹었던 때가 왔다. 

봄에도 괜찮았고 여름도 견딜만했는데 날씨가 추워지니까 문득문득 서글퍼진다. 이제 몇 달만 있으면 나의 20대는 끝장이 나버릴 테다.      


서른이 되기 싫은 이유는 명료하다. 스물아홉에 비해 얻는 것은 없고 잃는 것들만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이십대니까 괜찮다"라는 무적의 자기 합리화 멘트를 잃었다. "삼십대니까 괜찮아"는 들어본 적이 없다. 

요즘 들어 여기저기 쑤시고 아픈 날이 잦아졌다. 건강을 잃었다. 끝없이 마실 수 있었던 소주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주량을 잃었다. “스물아홉이에요”라고 말할 때마다 부러움 가득한 목소리로 “이십 대라 좋겠다”라고 하던 어른들의 동경을 잃었다. 세수할 때 발견한 베갯 자국이 점심쯤 되어야 옅어진다. 탄력을 잃었다. 기분 좋게 출근하면 사람들이 이슬이 피곤하냐고 묻는다. 생기를 잃었다. 스물아홉에 열렬히 좋아했던 가수를 서른에도 열렬히 좋아하면 철없다 소리를 듣는다. 철을 잃었다. 

이게 다 서른이 되어서 그렇다. 당최 쉽게 사랑할 수 없는 나이다.

나이 서른에 주어지는 강렬한 메리트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서른이 되는 날 거액의 위로금(?)이 통장에 찍힌다든가, 술에 절어버린 간이 10년을 주기로 리셋된다든가. 


서른은 억지로, 그리고 갑자기 어른이 되어야 하는 시점이다. 그러나 나는 어른이 아니다. 나 아직 어른이라기에는 정장이 정말로 안 어울리며 아직도 홍어 삼합을 못 먹고 재테크는 죄테크 수준이며 무엇보다 노는 게 제일 좋기 때문이다. 장담컨대 뽀로로보다 내가 훨씬 잘 논다.      


이런 얘기를 하면 "제일 좋을 때인지를 모르고... 내 나이 돼봐라" 하며 혀를 차는 사람들이 있다. 속으로 바락바락 대든다. 나도 압니다. 서른이 얼마나 좋고 가능성 많은 나이인지! 근데 그냥 싫은 걸 어떡해요! 영원히 이십 대이고 싶은걸 어떡해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20대를 10년이나 살아갈 사람들이 부러운 걸 어떡해요! 그쪽도 90대 노인이 보기엔 한창인 나이인 걸요! 차라리 “나 땐 말이야..”로 시작하는스테레오 타입 꼰대 멘트를 날려주십시오. 댁도 이맘땐 서른 됨을 서글퍼했잖아요.     


나는 정말로 서른이 얼마나 멋진 나이이고 할 수 있는 게 많은 때인지를 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싫은 것은 다른 것이다. 아는 것은 어쩔 수 있는 것인데, 싫은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냥 서른이 되기 싫다. 이렇게 떳떳하게 싫다고 말할 수 있음은 내 나이가 스물아홉이기 때문이다. 

이십 대 초반에 서른이 되기 싫다고 외치면 뭣 모르는 어린애 취급이나 받을 것이고, 나이 서른에 서른을 싫어하면 그것은 그냥 변절자이다. ‘서른 싫어’는 어쩌면 스물아홉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그러므로 스물아홉의 나는 일생중 아주 잠깐만 주어지는 ‘서른을 싫어할 자격’을 적극적으로 누리며 마지막 생떼를 있는 힘껏 부릴 요량이다.      


그리고 이 글을 환갑의 꼰대 강이슬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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