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가지 질문들을 삼킨다.
너의 지나간 애인들도 내가 사랑하는 너의 디테일들을 사랑했을까
해가 밝고 나서야 쏜을 버스에 태워 보낸다.
스무 시간도 넘게 옆구리를 붙이고 함께 있었는데 지난 스무 시간은 모조리 거짓말 같고 지금 얘를 보내는 1분만 현실처럼 느껴진다. 버스카드를 찾느라 가방을 뒤적이는 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못내 아쉬워 팔뚝을 잡는다.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있는 대로 티 내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살살 토닥이며 조심해서 가라고 말한다. 그래 봐야 버스 타고 한 시간 가는 길인데 나는 그 사이에 혹시라도 어떤 사고로 쏜이 다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어준다. 그가 탄 버스가 멀어져 조그마해질 때쯤 한숨과 함께 욕이 밀려 나온다.
“하, 존나 귀엽네”
나는 언제 이렇게 이중인격자가 되어버린 걸까.
가끔씩 쏜이 내 애인이라는 사실이 새삼 신기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 애를 처음 보았던 날을 떠올려 본다.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쏜은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큼직한 손으로 조그마한 에스프레소 샷잔을 재빠르게 다루던 쏜은 주문받은 커피를 신속하게 내어주고 난 뒤 뭔가 해낸 자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선 천천히 의자에 앉아서 느릿느릿 앞치마에 손을 닦고 아주 유유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손님이 오면 빠르게 일어나 빠른 솜씨로 커피를 내렸다. 순식간에 느려졌다 빨라졌다 하는 그 애를 카운터 너머로 바라보며 저 커다란 등 어딘가에 스피드를 제어하는 버튼 같은 게 달린 건 아닐까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러다 좀 반해버리고 말았다.
다음날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쏜이 일하는 카페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러길 한 달쯤 됐을 때 담배를 같이 태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연히 담배 피우는 타이밍이 맞았다. 우리는 2미터 정도 떨어져 멍한 얼굴로 천천히 담배를 피웠다. 나는 하늘에 둥둥 뜬 구름을 보는 척하며 곁눈질로 쏜을 훔쳐보았다. 담배 연기가 콧구멍으로 나가는지 눈구멍으로 나가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 뒤로 쏜이랑 담배 피우는 타이밍을 맞추고 싶어서 평소보다 훨씬 자주 바깥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몇 개월 동안 멀찍이 서서 담배만 뻑뻑 피우던 어느 날, 이런 식으로는 죽도 밥도 되지 못한 채 폐병만 나고 말겠구나 싶어서 내가 먼저 술 마시자고 말했다. 그날의 용기 덕분에 폐병이 나기 전에 쏜과 키스하는 사이가 될 수 있었다.
느리게 깜빡이는 쏜의 눈을 가까이서 바라보며 역시 사랑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직접 발품 팔아 쟁취하는 편이 빠르고 또 맞는 것 같다고 진지하게 말했더니 쏜이 겸연쩍게 웃었다. 살짝 웃을 때 생기는 그 애의 인디언 보조개에 집중하며 역시 사랑은 발품을 팔아 쟁취하는 편이 맞다고 확신했다.
쏜이 단골 카페의 직원이었을 땐 그의 실루엣에 간헐적으로 마음이 동했는데, 내 애인이 되고 난 후부터는 그간 몰랐던 그의 디테일에 연속 그리고 반복적으로 마음이 동한다. 이를테면 쏜의 약간 찌그러진 엄지손톱이나, 턱 밑에 흐리게 남은 흉터나, 미묘한 차이로 왼쪽이 조금 더 말려 올라간 입꼬리 같은, 가까이서 매만지고 들여다보지 않고는 몰랐을 디테일들. 쏜의 디테일들을 발견하고, 쓰다듬고, 그것들의 역사를 묻는다. 그가 말해주는 그의 기억들은 내게로 전해지며 나의 기억이 된다.
쏜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면 어쩔 수 없이 궁금해지는 것들이 있다. 그의 지나간 애인들도 내가 사랑하는 쏜의 디테일들을 사랑했을까. 그의 흉터랄지 점이랄지 살짝 주름진 살갗. 그 위에 나처럼 입을 맞추었을까. 똑같은 부위를 똑같은 이유로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을까. 혹은 내가 아직 찾지 못한, 어쩌면 앞으로도 찾지 못할 이 애의 디테일을 알아봐 주고 사랑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조금 속이 상해 그런 적이 있었느냐고 묻고 싶지만 묻는 대신 그 애의 머리통을 부드럽게 껴안는다. 맵시 있게 둥그런 쏜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이 머리통의 주인을 가장 사랑하는 건 나라고 자신한다. 사랑한다는 한 가지 이유로 백가지 물음표들을 삼키는 법을, 그런 후에 건강하게 소화시키는 방법을, 때로는 알고 싶은 것을 일부로 모를 때 더 충만하고 뿌듯하다는 사실을 느리게 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