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거킹 플랜트 와퍼 (2021.02 ~ 2021.07)
버거킹 플랜트와퍼가 죽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가 죽었다는 건 뒤늦게 알았다. 때문에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한바탕 슬퍼한 뒤에, 나는 혼자서 외롭게 슬픔으로 뒷북을 쳤다. 그가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을 진작 알았더라면 뭔가를 바꿀 수 있었을까. 인터넷에 그를 극찬하는 정성 가득한 후기라도 올려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내 후기를 보고 사람들이 호기심에 그를 찾았더라면, 그래서 그의 판매량이 많아졌더라면 그는 단 며칠이나마 죽음을 유예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만큼 그의 죽음이 진실로 슬프고 미안하다.
사랑하는 그를 만나러 버거킹에 갔다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 축 처진 어깨로 나오던 날을 나는 기억한다. 우리의 인연이 이렇게 짧을 줄 알았더라면 당신 생전에 더 자주 만나 뜨겁게 입을 맞출 걸 그랬다고 씁쓸한 후회를 했다. 그가 살아있을 적 함께 찍었던 사진을 천천히 넘겨보며 당신 같은 버거를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정말 고마웠다고 이제는 전하지 못할 혼잣말을 했다. 그의 온기가 그리웠다.
플랜트와퍼는 마요네즈만 제외하면 비건으로 즐길 수 있는 버거였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 회사에서 먹을 도시락을 싸지 못한 날, 논비건 친구와 간단한 식사를 해결할 때, 나는 버거킹에 가서 마요네즈를 뺀 플랜트 와퍼를 주문했다. 맛도 맛이었지만 식사를 하기 전, 인터넷으로 비건 식당을 검색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음식을 주문할 때 점원에게 논비건 성분이 있는지 질문하는 피로한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는 점이, 논비건 시절처럼 아무런 어려움 없이 '평범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는 현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플랜트와퍼를 게걸스럽게 베어 물며 다른 식당에도 피 묻지 않은 맛있는 메뉴가 딱 하나씩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맛이 없어도 좋으니 그냥 있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게 그렇게 큰 욕망일까 생각했다. 피 묻지 않은 음식을 찾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워야 할 일일 까도 생각했다.
다시 한번.
나는 그가 반년도 살지 못하고 죽어버렸다는 사실이 슬프다.
피 묻지 않은 메뉴는 그렇지 않은 메뉴보다 빨리 죽는 것만 같다. 나는 플랜트와퍼가 죽기 전에 롯데리아의 스위트어스어썸버거와 서브웨이의 얼터밋썹이 죽는 것을 봤다. 물론 논비건 메뉴들도 때때로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논비건이 논비건 메뉴의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와 비건이 비건 메뉴의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의 절망감은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나는 비건보다 논비건으로 더 오래 살아봤기 때문에 사랑하는 메뉴가 죽었을 때 충격의 차이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각각의 상황을 노래로 표현한다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논비건 메뉴가 죽었을 때 논비건의 상황 :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_ 하림
비건 메뉴가 죽었을 때 비건의 상황 : 사랑앓이 _ FT아일랜드
회사 앞에는 크고 쾌적하고 친절한 버거킹이 있다. 그리고 그곳엔 피 묻지 않은 메뉴 플랜트와퍼가 있었다. 이제는 없다. 피 묻지 않은 메뉴가 피 조차 흘리지 못하고 죽었지만 피 묻은 메뉴들은 피를 흘리며 여전히 살아있다. 오직 피 묻은 메뉴들만이 피를 흘리며 살아있다. 나는 피 묻은 음식을 먹고 싶지 않다. 혀끝의 쾌감을 위해 다른 생명을 해치고 싶지 않다. 물론 버거킹에 프렌치프라이가 있긴 하지만 버거킹은 버거킹이지 프렌치프라이킹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는 크고 쾌적하고 친절한 버거킹에 갈 수 없다.
논비건 메뉴가 사라졌을 때 논비건은 다른 식탁에 옮겨 앉을 수 있다.
비건 메뉴가 사라졌을 때 비건의 식탁은 좁아진다.
나는 이 사실이 참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