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3년 만에 그녀를 다시 만난 건 백제의 문화유산이자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미륵사지에 위치한 국립 익산박물관에서였다.
예전에는 같이 일하는 회사 동료였지만, 이제는 대학교수로 재직 중인 경희대학교 박상희 교수님과의 만남은 열정 넘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
익산박물관의 '어린이박물관 MI프로젝트'를 함께 하기 위해 우리는 그곳을 찾았고, 난 3년간 유럽에 살면서 자주 방문했었던 수많은 박물관들의 모습이 떠올라 감회가 남달랐던 기억이 난다.
1년 여의 MI 프로젝트가 끝나고 드디어 올해 1월 '국립 익산어린이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image by 박상희
유럽에 살면서 이탈리아와 그리스, 심지어는 덴마크의 작은 박물관을 다니면서도 난 항상 그들의 조상이 남겨준 유물과 유적이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 앞에서, 다 쓰러져 이제는 기둥도 몇 개 남지 않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소매치기들 때문에 소지품 걱정을 해야 하고, 가이드의 설명을 귀가 아프도록 들어야 하지만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그곳.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덴마크의 박물관에도 자신들의 유물보다 다른 나라의 유물들이 더 많다는 참 아이러니 한 현실 앞에서도, 난 그저 그런 조상들의 노력(?) 덕분에 후손들이 그 덕을 보고 있다는 것이 참 배가 아프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생각은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의 흔적들을 아끼고 잘 보존하고 있는 그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덴마크 사람들은 조상들이 남긴 역사적인 건축물을 보호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걸어 다녀야 하는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고, 차가 다니지 못하는 좁은 골목길도, 울퉁불퉁한 돌길도 모두 보존해야 하는 역사의 일부로 생각한다. 건물 외부에는 함부로 페인트칠도 할 수 없고, 지붕을 한 번 수리하려면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지만 조상들의 건축 방식을 고수하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살기도 한다.
바이킹 문화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개발을 하지 않는 곳도 있고, 도시 분위기와 맞지 않는 높은 건물은 함부로 지을 수 없기도 하다. 그런 그들의 노력이 많은 관광수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을 3년간 지켜보면서 오히려 새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보다 과거의 것들을 잘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유물을 가져와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그들의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모습이 이제는 불편한 현실이 아니라 '어떤 것이든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지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이번 프로젝트는 애착이 많이 가는 프로젝트였다.
국립 익산 박물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익산 박물관의 가치를 찾는 작업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가치를 어떻게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알려줄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대학생들과 함께 그들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보면서 작업하는 내내 참 즐겁기도 했다.
국립 익산 어린이박물관 MI / image by 국립익산박물관
어린이 박물관 로고체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박물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미륵사지탑의 형태를 글자체에 적용해본 대학생의 아이디어가 참 신선했고, 박물관의 정체성을 잘 담고 있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다시 여러 차례 다듬는 과정을 거쳐 이 아이디어는 최종 결과물로 이어졌다.
대학생의 도전정신과 새로운 시선이 만들어낸 쾌거라고 할 수 있다.
image by 박상희
로고체와 함께 미륵사지 탑을 상징하는 심벌은 과거를 미래와 연결시켜주는 빛으로 표현하였다.
과거는 언제나 현재, 그리고 미래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과거의 모습을 통해 아이들이 밝게 빛나는 미래의 꿈을 만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빛은 디지털 박물관이라는 의미를 잘 전달해주는 픽셀로 표현했다.
image by 박상희
또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과거로의 여행을 함께 떠날 캐릭터를 개발하였는데, 요즘 아이들에게 친숙한 할아버지의 모습과 할아버지가 키우는 애완동물의 모습을 모티브로하였다.
맞벌이하는 부모 대신 조부모 손에 키워지는 아이들이 많은 요즘의 상황을 반영해 친근한 할아버지가 자신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콘셉트이며, 캐릭터의 주인공은 백제의 미륵사지 도록에 등장하는 기와장인 '와박사'와 건축장인 '노반박사'의 모습을 상상하며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image by 국립익산박물관
국립 익산 어린이박물관 캐릭터 / image by 국립익산박물관
디자인도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한 디자인이 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지키기 위한 디자인이 있다.
디자이너들의 역할 중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창작에 대한 고통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디자이너의 역할은 있는 것들의 가치를 잘 찾아내고 지켜주는 것이다.
익산어린이박물관의 프로젝트 역시 미륵사지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잘 찾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제품이, 서비스가, 그리고 공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열심히 찾아보는 일이 결국 좋은 디자인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