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티 피플, 정세랑
2020년에도 크리스마스는 왔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캐럴도, 북적이는 사람들도,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들뜬 표정으로 거리에 나온 아이들도 없다. 거리두기의 단계가 점점 높아지더니 이젠 5인 이상이 모이지 못하고 있다. 멀어진 거리만큼, 길어지는 기간만큼 마음이 공허하다. 심지어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 사람이 그립다. 사람들을 만나 듣는 이야기가 그립다.
망할 코로나가 찾아오기 전에 난 자주 사람 구경을 하러 카페에 갔었다.
카페는 유동인구가 많고 번잡한 곳에 위치한 곳일수록 좋다. 커다란 창 앞에 자리를 잡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본다. 좌절을 했는지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걷는 여자, 뭐가 그렇게 바쁜지 겉옷을 입지도, 걸치지도 못한 채로 뛰어가는 남자, 강아지가 아픈지 걱정스레 품에 안고 동물병원으로 들어가는 남자, 가출이라도 한 걸까 자기보다 큰 배낭을 메고 거리를 헤매는 여자아이, 카페 앞 베이글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앳되 보이는 학생들, 멋들어진 트렌치코트를 입은 머리가 슈크림 같은 할아버지.
하염없이 보다가 문득 그들의 이름이 궁금해진다. 그러다 그들의 하루가 궁금해지고 어느 땐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의 어린 시절이, 그들의 친구가, 그들의 자식들까지 궁금해진다. 길가는 사람을 붙들고 "저기 죄송한데요, 이름이 뭐예요?"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사람구경은 늘 궁금함을 남겼다. 이 소설을 처음 만났을 때, 책에 50명쯤의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제목이 <피프티 피플>이라는 걸 알았을 때, 소제목들이 모두 누구의 이름으로 되어있다는 걸 알았을 때 뛸 듯이 기뻤던 이유다.
이 책을 펼치기 전에 준비할 것이 있다. 하얀 종이와 펜이 필요하다. 작가는 자꾸 책을 앞으로 넘겨 그새 잊어버린 이름들을 찾게 했다. 자세를 고쳐 앉고 처음 등장하는 송수정의 이름부터 적었다. [송수정]의 아래에는 '결혼식' '엄마의 암세포' 등을 적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이기윤]의 이름 아래에는 '레지던트' '270도로 목이 잘린 여자' '귓속에 벌이 들어간 환자'를, 그리고 [조양선] 아래에는 '딸 승희' '쇠로 된 빵칼' 따위를 적었다. 그냥 끌리는 단어들을 그 이름 아래에 적어뒀다. 책의 초반부를 지나며 쇠로 된 빵칼로 목이 270도로 잘린 여자애가 조양선의 딸 승희라는 걸, 귓속에 벌이 들어간 환자가 [문우남]이었다는 걸, [최애선]의 '둘째 며느리 윤나' [배윤나]가 자주 가던 베이글 가게에서 토끼 맨투맨을 자주 입던 아르바이트생이 승희라는 걸 알았을 때 퍼즐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낮고 넓은 테이블에, 조각 수가 많은 퍼즐을 쏟아두고 오래오래 맞추고 싶습니다. 그렇게 맞추다 보면 거의 백색에 가까운 하늘색 조각들만 끝에 남을 때가 잦습니다. 그런 조각들을 쥐었을 때 문득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 한 사람 한 사람은 미색밖에 띠지 않는다 해도 나란히 나란히 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를요.
(329쪽, 작가의 말)
성실히 퍼즐 맞추기를 하다 보면 운 좋게 흐뭇한 조각을 손에 쥐기도, 도려내고 싶은 썩은 것들의 조각을 마주하기도, 아픔의 조각들에 마음이 베이기도 한다. 작가는 아픔의 조각들에게 많은 자리를 내줬다. 그 아픔들은 우리의 현실과 너무 맞닿아 있었다. "이 이야기는 2016년에 써야 했구나"라는 작가의 말을 마지막에 읽고 더 깊게 아파야 했다.
너 그거 알아?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안전법들은 유가족들이 만든 거야.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다시 책의 맨 앞으로 돌아와 50명의 이름을 바라본다. 누구였는지 명확하게 기억나는 이름도 있고, 희미하고 뿌옇게 떠오르는 이름 그리고 이런 이름이 있었나 생각하게 하는 이름도 있다. 괜히 미안해져서 이름들을 열심히 적어뒀던 종이를 다시 본다. 이름 밑에 적어뒀던 그들의 인생을 매만지며 '최선을 다해 기억할게' 생각한다. 읽는 동안 평소 좋아하던 노래가 떠올라 이 노래를 반복해 들었다.
수 없이 잃었던 춥고 모진 날 사이로 조용히 잊혀진 네 이름을 알아. 멈추지 않을게 몇 번이라도 외칠게. 믿을 수 없도록 멀어도.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5인 이상 모이는 것이 금지된 크리스마스에, 50명이 넘는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 흐르는 눈물을 참기도 했고, 미소를 머금기도 했다. 책 속에 있는 인물들이었지만 그들은 나와, 나의 가족, 친구들 그리고 언제가 한 번쯤 옷깃을 스쳤을 인연들과 많이 닮았다. 유난히 추운 올해 크리스마스를 어딘가에서 묵묵히 보내고 있을 이름들을 떠올려본다.
서로 만나지 못해 공허한 올해의 크리스마스, 그들과 닮아있는 피프티 피플 속의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건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