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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Feb 04. 2021

난민, 민들레의 홀씨가 되다

2021년 2월 1일, 미얀마 다시 군부 쿠데타

83%. 선거에서 한 정당이 득표할 수 있는 수치라고 볼 수 있을까. 

흔히 북한에서나 가능한 숫자라고 알고 있지만 정당한 투표 절차를 거치고도 이런 득표율을 기록하는 곳이 있었다. 관광대국 태국과 인구대국 인도 사이, 미얀마(옛 명칭 버마)다.


아웅산 수치 여사는 아웅산 장군의 딸이다. 공교롭게도 아웅산 수치 여사가 한국 언론에 회자되던 시기는 박근혜 시절이다. 둘다 장군의 딸이거든. 근데 그거 빼고는 공통점이 1도 없다. 개인사에서도 사상적인 면에서도 차라리 정반대라고 보면 모를까 둘은 닮은 곳이 전혀 없다.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NLD가 2015년 집권당이 되자 한국에서 2010년대 초까지 국내 난민인정자의 숫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미얀마인들은 그럼 이제 너네 나라로 돌아가야 되는 거 아니냐, 압박을 받았다. 당시 나는 NLD-LA(NLD 자유지역 리버럴 에어리어로 본국 외에 있는 지부들을 이렇게 부름.) 한국 지부의 대표인 고 내툰나잉 대표를 비롯한 10명의 정치난민을 인터뷰 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이 내용에 대해서 조심스레 물어봤었다.


인권활동가들도 그리고 난민들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니 지금도 난민의 최우선 해결책은 난민 발생 사유의 소멸에 따른 본국 귀환이기 때문이다. 군부 정권에 대항하여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국외로 피신했던 88학번의 미얀마 청년들. 이들은 민주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는 시간이 27년이나 걸릴 줄 몰랐다. 모두 하나 같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한국까지 오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참고로, 1988년 8월 8일을 기점으로 미얀마 전국에서 진행된 군부 타도 시위는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주요 활동가들의 해외 도피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당시에는 이주노동자라는 개념도 없었을 뿐더러 한국? 미얀마 쪽에서 보면 아웃 오브 안중인 나라였다. 그래서 '선진국' 한국으로 도피한다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았다. 인터뷰이 10명 중 절반은 한국이 어디있는지 모르고 일본 가다가 거절 당해서 임시로 머무르거나 혹은 선원 비자로 경유하기 위해 들어온 경우였다. 세계적으로 쌀을 수출하고 축구도 잘하던 미얀마 입장에서 한국은 '선진국'이 아니었기에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는 임시거처였던 셈이다.


근데 와보니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으로 군부 정권을 교체했던 거다, 한국이. 그래서 이들이 한국을 배우기 시작했던 거였고. 그들은 90년대 전체를 한국에서 보냈다. 사람 인생에서 사회적 정체성이 가장 크게 구성되는 2,30대 시절을 한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 곧 이은 IMF, 또 이어 다시 일어나는 한국을 몸소 경험하며 조국 미얀마의 재건을 꿈꿨다. 미얀마 정치 난민들이 바랐던 것은 한국에서의 호의호식이 아니라 본국 미얀마가 한국처럼 잘 살게 되는 것이었다.


맞다. 그래서 2015년을 전후로 정치 난민들이 많이 돌아갔다. 나도 궁금했다. 그럼 이제 한국에 남은 NLD 지부는 어떻게 되는 건지? 대사관은 있으니까 문화원 같은 역할로 선회하는 건가? 근데 아니었다. 미얀마의 군부는 집요했다. 그들은 헌법에 군부가 의석의 1/4을 차지하게 규정했고 외국인 배우자를 둔 이가 지도자로 나서지 못하게 못 박았다. 민주화의 구심점 '아웅산 수치'를 중심으로 뭉칠 시민들을 두려워했다.


NLD 사람들은 이걸 알고 있었다. 헌법을 바꾸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고. 계속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로힝야 탄압에 대한 아웅산 수치의 미온적인 태도에서도 감쌌다.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현재 그녀의 손발을 붙들고 있는 군부가 문제인 거라고.


한국에서도 아웅산 수치 여사에게 수여했던 인권상을 박탈했다. 로힝야 사건 이후로 전세계는 '아웅산 수치' 개인에게 실망했다. 그렇게 군부는 문민 정부의 등장 이후로도 민주화로의 순조로운 이행을 끊임없이 막았고 계획대로 세계는 아웅산 수치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나 5년간 이런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참패하자 이들은 '부정선거' 혐의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미얀마 사람들은 아웅산 수치 여사를 중심으로 힘을 모은다. 하지만 미얀마 사람도 아닌 각국의 국민들은 어떨까? 이들은 자신이 본 미얀마인, 난민들을 보고 지지를 결정한다. 한국에 있는 미얀마 난민들은 많은 수가 성실하다. 신문 사회면에 나오는 일은 억울한 노동 현장에서의 죽음 뿐이고 대부분 열심히 일하고, 공부한다. 미얀마 사람들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일반적인 믿음이 그들이 믿는 아웅산 수치 여사에게까지 가 닿는 것이다.


난민으로 이주한 국가에서의 인연으로 귀환 후 국제개발원조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오히려 이 부분이 더 큰 연대의 근원일지도 모른다. 마음으로 지지하고 후원하고 연대하는 것. 우리는 절친의 배신으로 쓰러진 아웅산 장군에 대한 연민이나 62년 군부 독재를 통해 공동체를 파괴한 군부에 대한 분노보다는 내 주변의 이웃에게 더 많은 공감을 한다. 내 지인들이 아파하니까 남일 같지가 않다. 본국의 가족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코로나도 힘든데 쿠데타로 연락 두절을 걱정해야 하다니, 오.마이.갓.


이주노동자 쿼터를 통해 한국에 머무는 각국의 이주노동자들이 지금도 현장 곳곳에 있다. 이들의 본국에서 미얀마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이주노동자였던 이들은 '현지 체류 중 난민'이 된다. 지난 2일 양곤국제공항으로 향했던 대한항공 여객기는 회항했다. 국경을 봉쇄하면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게 된다. 하루아침에 날벼락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다. 


이들이 한국까지 이주노동자로 올 때는 내 가족들과 행복한 미래를 꿈꿨기 때문이지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보자고 온 게 아니었다. 설혹 개인적 욕망으로 인한 선택이었다 해도 내 나라를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건 아주아주 상황이 많이 다른 것이다. 


모두의 안녕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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