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도 자기 머리를 못 깎는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2023년 초 어느 날, 나는 회사 옆 자리 동료가 옆머리와 뒷머리를 스스로 바리깡으로 자른다는 말을 듣고 바리깡을 사버렸다. 대외적으로 최근 많이 오른 식료품, 난방비 물가에 맞서 지출을 줄인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사실 평소 머리카락 관리에 크게 신경 쓰지 않던 나로서는 미용실에 갈 때마다 들어가는 돈을 아껴보려는 얄팍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바리깡을 산다는 건 의외로 큰 결심이 필요했다. 영화 <아저씨>의 원빈처럼 삐딱하게 고개를 숙인 채 비장하게 바리깡을 돌려보려는 것까진 (진짜로) 아니었지만 나 혼자서 거울 보면서 양쪽 길이를 맞추는 것도 매우 힘들 것 같고 무엇보다 뒷머리는 안 보이는데 대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많았다. 친구들마저도 대체 바리깡을 왜 샀냐부터 시작해서 결국 파먹은 머리카락 정돈을 위해 미용실을 갈 수밖에 없을 거라는 저주를 퍼부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어렵겠다 싶었다. 대체 왜 바리깡을 사버렸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돈 아껴보려는 얄팍한 마음이 살짝 더 강해서 주문 취소를 하지 않았다.
바리깡은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음날 바로 배송되었다. 평소라면 기분 좋게 택배 상자를 받았겠지만 왠지 모르게 바리깡은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받았다. 바리깡이란 물건은 이런 물건이었던 걸까? 근심과 걱정으로 택배 상자를 받아보는 경험을 하고 싶다면, 바리깡 주문할 것을 강력하게 추천해 본다.
오늘 머리를 감다가 옆으로 삐져나온 옆머리가 영 거슬렸다. 그리고 동시에 택배 상자를 뜯지도 않고 한동안 집에 고이 모셔만 두고 있던 바리깡을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담감에 잠깐 그냥 미용실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미 바리깡을 구입하느라 들어간 내 돈은 나를 바리깡으로 이끌었다. 젠장! 나는 돈의 노예인 걸까......
포장을 뜯어보니 구성품은 꽤나 알찼다. 바리깡과 보조 날 2개, 청소용 솔, 바리깡 날에 넣을 오일, 빗, 헤어컷 보, USB충전케이블, 헤어 고정 핀... 꼼꼼하게 들어있었다. 꼼꼼하게 들어 있어서 기분이 좋아야 정상인데, 뜯자마자 든 생각은 '바리깡을 쓰는 게 이런 도구들을 다 다루는 엄청난 일이었어!?'였다. 맙소사......
헤어컷 보를 뒤집어쓰고 바리깡과 빗을 든 채 욕실 거울 앞에 섰을 때 나의 모습은 원빈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나도 옆구리에 총을 한 발 맞았다면 분노에 가득 차서 삐뚤어진 채로 과감히 바리깡을 돌릴 수 있지 않았을까? 바리깡 전원을 켠 후, 보기 싫었던 나의 옆머리에 바리깡을 천천히 갖다 댔다.
아... 망했다. 옆머리에 닿아마자 어찌나 잘 밀리던지 순식간에 한 움큼 파먹어버렸다. 내가 의도한 방향과 세기는 어디로 간 거지 싶었다. 아니 바리깡을 든 손이 내 손은 맞나? 얼어 죽을 원빈과 화가 밥 아저씨처럼 바리깡으로 하는 거 참 쉽죠 하던 직장 동료의 얼굴이 떠올랐다. 으아악!!
멍하니 거울을 쳐다보다가 지금이라도 미용실로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가 감히 덤벼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완전히! 100퍼센트! 들었기 때문이다. 바리깡 전원을 끄는 순간, 또 나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뭐다? 바리깡이 얼만데...... 였다. 하아...... 5분은 바리깡을 켰다 껐다 하면서 고민했던 것 같다. 바리깡을 당근에 팔면 그리 큰 손해는 아닐 거야,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끝까지는 가봐야지, 미용실에 가면 미용사는 이렇게 실패하고 온 사람들 많아요~ 호호호~!......
예상하겠지만 이 사단의 시작은 돈을 아껴보려는 수작이었다. 그래서 계속해보는 걸로 결정했다. 물론 다시 바리깡을 들고 밀자마자 몇 초만에 후회를 하긴 했지만 적어도 다시 바리깡을 켤 때는 아주 비장했다. 이 순간만큼은 옆구리에 총 맞은 원빈의 분노를 느꼈던 것 같다. 바리깡 너가 뭐길래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나!?
그리고 바리깡을 들고 계속 깎는 동안 마법의 경험을 했다. 분명히 똑같은 힘과 각도로 바리깡을 돌렸는데 왜 왼쪽이 오른쪽보다 더 짧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오른쪽에만 살짝 돌리면 이번엔 오른쪽이 왼쪽보다 더 짧은 느낌이 들었다. 바리깡은 돌릴 때마다 머리카락을 더 파먹도록 만들어져 있는 걸까? 몇 번 반복하니까 어느새 내 옆머리가 다 없어져버렸다....... 아니 대체 어디가 쉽다는 거야 어디가!?
심지어 나는 시력이 매우 나쁘다. 한쪽 머리를 밀고 나면 머리를 물로 헹구고 안경을 쓰고 길이를 확인해야 했고, 반대편을 또 밀고 나면 다시 머리를 헹구고 안경을 쓰고 확인해야 했다. 이거 물값이 이발비보다 더 나오겠는데 싶은 생각도 솔직히 들었다. 어렵고... 물 쓰고... 옆머리는 의도와는 다르게 없어져만 가고... 30분쯤 지났을 때는 나도 어느새 막 나가는 기분으로 바리깡을 마구마구 돌리기 시작했던 것도 같다. 어디서도 해보지 못한 마법과 같은 경험이었다.
이윽고 양쪽 옆머리가 모두 없어지고 난 뒤에야 마법에서 풀려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망했다는 표현이 부족한 그 어떤 상태가 거울 속에 있었다. 주섬주섬 헤어컷 보에 쌓인 머리카락과 욕실 바닥에 널리 잘게 부서진 머리카락들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치웠다. 허망함으로 가득한 침묵으로 바리깡을 청소해서 다시 박스에 넣는 그 순간까지 시간이 멈춘 듯했다. 너무 충격이 크면 할 말을 잃는다는 것. 그게 이런 것 아닐까? 왜 원빈이 바리깡을 돌리다가 그렇게 짧은 머리가 될 때까지 돌렸는지 알 것도 같았다. 분명 그도 좌우 길이를 맞추는 게 어려웠을 거다. 나만 실패한 게 아니다. 아니야! 아니라고!!
바리깡 상자를 방 깊숙한 곳에 치우고 난 뒤 차라리 홀가분해졌다. 뭐 어쩌면 괜찮은 것일지도 모른다. 살면서 이런 경험을 언제 또 해볼 수 있을까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긍정적인 생각만 남겨야 밤늦게까지 들이켤 술을 맛있게라도 먹지 않을까? 하아...... 이제 저 바리깡은 당근행이 확정됐다. 모든 걸 홀가분하게 하는 거다. 방 안에는 바리깡이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술을 사러 나가본다. 그런데 이 순간 스멀스멀 드는 생각이 있다. 바리깡비 뽑으려면 아직 몇 번은 더 해야 하는데...?! 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