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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은 달 Jan 28. 2023

건강한 상상

30일 쓰기

집을 지을 그날을 상상한다. 언젠가 지구 위에 내 땅이 허락된 곳이 생긴다면 흙을 고르고 터를 다져 그 위로 나만의 집을 지어 올리는 건강한 상상.


오늘은 벽돌을 고르는 날이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주택들이 줄지어 자리한 골목골목을 느린 속도로 유영한다. 희고, 밝고, 검고, 붉고 혹은 검붉은 각양각색의 건물들이 자기를 뽑아달라 어깨에 각을 잡고 가슴을 한껏 내민 채 늘어서있다.


난 붉은색이 좋더라. 붉은색이 어찌나 다양한지 차마 한 놈을 고르지 못하고 죄 마음에 품다 보면 어느덧 집에 도착한다. 주차차단기를 지나 지하 주차장으로 낼름 들어간 뒤 엘리베이터에 무심하게 몸을 실었다 내리면 메마른 현관문이 맞이하는 나의 집, 나의 아파트. 따뜻하고 건조한 삶. 뻔한 사각형들이 옹기종기 한데 모여 유행하는 외관컬러를 장착한 높은 주거용 복합건물. 그리하여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살고 싶어하는 중산층의 상징 아파트에 도달한다.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을 상상하며 오늘의 내가 몸을 뉘일 곳은 바로 여기다. 하루에도 몇 번을 지었다 부쉈다 하며 현실을 살아나간다.


작년 초만 해도 집 짓기에 대한 의욕이 남산만 했다. 건축학과 편입을 알아보다 전국의 집짓기 학교도 찾아보고, 우선 책부터 파보자며 서점어플의 장바구니에 십 수어권을 담아 넣고 고스란히 한 해를 보냈다. 욕망은 들끓고 실행은 미미하여 망상과 상상만으로 한 해를 버틴 셈이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지어 올린 집들이 한채 두채 모여 때로는 마을이 되었다가 한날은 다 허물어버리고 오늘에 이르렀다.



아무리 상상이 인간의 특권이라 하지만, 이렇게 더 나아가지 못하고 고여있는 상상포화상태를 어찌하면 좋을까. 한때는 가난의 브레이크가 나를 상상에만 가두고 제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이라 여겼다. 돈핑계, 운핑계, 부모핑계, 시대핑계, 화려한 핑계들을 만들어 한 발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매장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핑계들이 나를 삼켰다.


살아남아야 한다. 핑계의 무덤을 뛰쳐나가 살아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머릿속 무수한 상상과 생각들을 말과 글과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생각에 깔려 질식하지 않게, 이루지 못한 꿈들을 후회하지 않게, 남은 생이 허망하지 않게, 그리하여 내가 오늘을 제대로 살 수 있게.


마음을 다잡고,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 그리고 그 너머의 목록들을 그려보아야겠다. 건강한 마무리로 건강해지기를. 나를 세워 너를 돌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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