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육 멈춤의 날에 대한 짧은 소고
판단을 유보하고 말을 아낀다. 그렇게 서서히 사라져 간다. 생각을 풀고 말로 정리하고 드러내고 하는 이 모든 과정이 그저 그렇게 그저 그렇게. 하여 자리에 앉아 조금은 풀어내볼까. 두서없이 주절주절.
요 즈음은 수영에 집중했다. 보다 명확히 표현하자면 수영에만 겨우 맥을 이어 붙여 허우적 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중급이 되었다. 기초에서 초급을 거쳐 중급. 마치 살아 숨 쉬다 보니 어느새 40대가 되어있듯, 강습을 등록하고 매달 이어 듣다 보니 이번달을 기점으로 중급반이라는 타이틀이 달렸다. 꾸준함. 더디지만, 지금의 내가 겨우 나의 전부 같지만 매일매일의 조금씩 조금씩의 힘은 가히 놀랍고, 삶의 진리는 꾸준함이 전부인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손바닥을 맞거나 엎드려 뻗혀 엉덩이를 맞는 일, 무지개무늬 양말을 신었다고 출석부로 뺨을 맞은 일, 지각했다고 뺨을 맞은 일, 어떤 연유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무수한 말도 안 되는 처벌들은 그저 에피소드가 되어 재잘재잘거릴 뿐 익숙해지고 무뎌진 비정상의 정상화가 만연되어있던 때가 있었다. 그리하여 개정된 법은 학생의 인권을 보호하기 시작했고, 보호의 선은 흔들흔들 끝을 모르고 정도를 모르고 교실안팎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공교육 멈춤의 날은 한국의 교실이 어느 지경인지 드러내게 하고, 선생님을 그리고 학부모를 단결하게 하였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가 누굴 탓할 수 있을까. 정부? 교육부? 대통령? 나만 잘되면, 나의 가족만 잘 되면 타인의 안위는 그저 타자화된 이미지에 불과할 뿐인 지금 우리에게 과연 교육이라는 단어가 유의미할까. 나의 귀한 아이가 남들보다 앞선 교육을 받고 경쟁에서 이겨 명성 높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업을 가져 돈 많이 벌고 잘 사는 것이 대다수의 목표가 되지 않았던가. 입시를 위한 사교육을 떠받들고 공교육은 그저 낮시간을 버는, 그리하여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무색해지지 않았던가. 일타강사, 족집게과외로 남들보다 더 더 더. 그리하여 더 더 더 좋은 대학으로. 그리하여 우리는 어디로?
삶이, 그것이 다가 아닐진대. 자유자본주의 앞에 돈 앞에 우리는 힘을 잃고 방황하며 한 방향으로 휩쓸리지 않는지, 교실 속 금쪽이가 내 아이일 수도, 진상학부모가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자아성찰과 비판이 필요하지 않을까. 쏙 빼놓고 나만 무해한 인간이긴 거의 불가능하다. 빌런을 만들어내고 물어뜯기 이전에 나를 돌아보고, 나의 삶을 돌아볼 여유가 모두에게 깃들 수 있길. 나를 잠시 멈추고 살펴보며 오롯한 내가 될 수 있기를. 물론 지금 이 모든 노력들의 당위성은 말해 무엇하겠나.
또 다른 이야기지만, 사교육에 목숨 걸어 보이는 보이는 분위기, 초등학생이 벌써 학원을 몇 개씩이나 다닌다는 이야기, 알고 보니 단순이 교육만을 목적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극성부모라며 지탄하던 멋모르던 과거의 나를 반성하며 이자리를 빌어 사과드리며. 부모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아이를 돌볼 골목이, 어른들이, 마을이 사라진 지금 아이의 육아는 온전히 엄마가 혹은 또다른 여자가 암묵적으로 도맡고 있다. 양성평등은 아직 요원해 보이며 그나마 맞벌이인 경우는 퇴근 전까지 아이를 맡아줄 기관이 필요하여 셔틀버스를 운영하는 여러 학원들을 돌리게 된다. 상대적으로 낮시간이 여유로운 엄마들은 셔틀버스는 없지만 그래도 괜찮은 학원들을 보내며 아이의 교육을 외부에 맡긴다. 남겨진 아이들과 이를 맡아줄 사교육의 콜라보. 남들보다 뛰어난 아이를 만들기 위한, 그리고 엄마에게 잠시나마 쉼과 위안과 안심을 제공할 사교육이 점점 더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번성하며, 점점 고가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교육이 자본에 먹힌 실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교권이 무지막지했던 시절을 막기 위해 인권이 강화되었다가 교실에서 쓴맛을 보고 다시 조례를 개정하기 위해 사회는 노력 중이다. 이런 부단한 노력들이 끝내 중용에 이르러 정답에 가까워지기를, 끝끝내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두 눈 부릅뜨고 행보하기를 나를 비롯하여 모두에게 빌어본다. 할렐루냐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