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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은 예술 박기열 Jun 28. 2020

생각을 팝니다.

생각을 팝니다         

 

대중에게 강연이나 강의하는 일을 주업으로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면대면을 가로막는 전염병은 엄청난 위협이고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내 실수나 능력이 부족해서 일거리가 줄어든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나를 싫어하는 누군가에 의해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마음의 작은 위안이랄까? 

자연 앞에선 언제나 나약하고 초라한 인간이 어찌 감히 허리케인이나 쓰나미 같은 자연의 분노를 탓하고 원망하겠는가? 하지만 신기한 것은 이런 일을 예견한 게 아닌데도 코로나 19가 창궐하기 직전, 나는 두 곳의 회사에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평생 예술가로 살면서 내 머릿속에 꽉 차 떠돌아다니기만 했던 생각들을 사겠다는 회사가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지만 그 덕에 자칫 손가락만 빨고 있을 뻔한 오늘날의 위기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는 것도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든다. 


생각 없는 B-ero / 조합토, 색유, 테라시즐레타, 삼벌소성, 2008  (박기열 作)


예술가이자 강연자인 내가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다양하다.

하나는 금융회사를 위한 브랜드 마케팅을, 또 하나는 VR을 기반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회사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프로젝트와 관련해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일이다.

현대의 금융업에서는 마케팅이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 소셜 네트워크나 미디어를 통한 고객과의 정서적인 교감에 신경을 많이 쓰는데 그것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선택하고 만드는 일, 고객의 소비 감정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소통하는 일에 나의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국가 육성사업이기도 한 VR 산업은 교육 외에도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그 범용성을 입증하고 있고 요즘은

 K-POP이나 한류 문화를 해외에 알리는 장치로도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회사 구성원 대부분이 개발자 출신이라 프로젝트 안에 문화와 예술의 가치를 불어넣어 줄 전문가가 꼭 필요하다. 이런 일들에 나의 쓰임이 가능해진 또 다른 이유는 지난 몇 년간 기업강의를 하면서 나 스스로 기업과 기업 생리에 대한 이해가 높아져 떠돌아다니던 생각을 비로소 남들 앞에 정리하여 나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디어를 제공한다는 건 말 그대로 각 회사의 현안과 문제점을 공유하고 파악해 내가 가진 전문성과 경험을 통해 분석된 생각을 전달하여 성과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창의적인 것에 더 큰 가치를 두어 어떤 양념도 곁들이지 않은 날 것의 아이디어를 요구하는 소수의 명석한 관리자들도 있지만 고객과의 소통과 개방성을 지향하는 요즘의 시장에서 소비자와 생산자의 입장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생각을 구사할 수 있는 창작의 경험을 가진 자, 그중에서도 뜬구름 같은 아이디어를 현실 세계로 혹은 생산적인 결과로 이끌어올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수요는 최근의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앞으로 점점 늘어날 것이라 예상된다. 그래서인지 요즘 나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다. 평생 유목민처럼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을 무차별적으로 소비했던 내가, 긴 굴곡의 시간을 거쳐 작지만 가치를 인정받게 된 생각을 제대로 다듬고 완성하기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그 생각을 확장시키기 위한 또 다른 생각의 벽돌을 쌓으며 어느덧 생각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생각이란 것이 과거 많은 사람들로부터 재능기부란 이름으로 손쉽게 제공받을 수 있다고 여겨졌던 무형의 가치에서 벗어나 온전한 형태를 가진 콘텐츠의 모습으로 그 집에 살 수 있도록 말이다.

현재 두 회사에서는 일정한 대가 외에 내가 언제든지, 누구에게라도 자유롭게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직함으로 배려를 해준다. 나는 기업의 규칙과 틀을 깨는 사람이 아니라 앞으로 회사가 맞이하게 될 여러 형태의 미래를 다양한 시각에서 관찰하며 내부에서 감지하기 어려운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회사마다 내가 의견을 개진하고 제안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근사한 직함을 주지만 사실 직함이 크게 의미가 없는 게 결국 그들을 설득해 업무에 대입시킨 아이디어가 결과로 확인하지 못한다면 나를 뭐라 부르건 전부 껍데기일 뿐이다.

또한 팬데믹 이후 많은 회사들이 재택근무의 가능성을 몸소 확인한 경험이 내가 붙박이로 회사에 붙어 일하지 않더라도 소통하고 일을 진행하는 것에 큰 문제가 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절호의 계기가 되었다. 이런 나의 경험을 토대로 우린 또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이처럼 생각을 판다는 것이 창작자로 살았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또는 어디에도 소속될 수 있는 나 같은 프리랜서에게만 가능한 일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생각을 가치로 치환시키기 위해선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 외에 생각하는 것을 스트레스나 골치 아픔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새로운 미래 공간으로 이동하기 위한 확장의 매개(媒介)로 삼아야 한다. 대부분 회사에서 부품으로써의 역할만을 자처하는 사람은 ‘받은 만큼 일하자’ 주의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사람은 시대가 요구하는 워라벨 세상에서도 자신의 삶과 일을 따로 분리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각은 정해진 공간과 시간에서 마음을 먹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순간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고 이렇게 튀어나온 생각들은 우리의 삶을 증진시키기 때문이다. 삶과 함께 증진된 생각들은 바로 눈앞에 놓인 일들을 해결해주기도 하지만 그 생각들이 모여 끊임없는 선택을 하게 하고 그 선택한 순간들이 다시 자신의 미래가 되어 돌아오는 구조이니 애써 삶과 일을 분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다면 조금 어려울 수 있으니 생각을 하는 간단한 방법을 제안해 본다.


우선 아주 가까이에 있고 볼품없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연습을 해보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일을 현실로 가져오려는 어렵고 힘든 일을 하려면 그동안 소홀했던 생각을 차곡차곡 쌓아 언제든 꺼낼 수 있도록 다양한 연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매주 목요일 엄청나게 많은 양의 재활용 쓰레기를 한 번에 가지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다던가 빨래건조대의 한정된 공간보다 훨씬 많은 양의 빨래를 효과적으로 배치할 방법을 찾는 일부터 시작해도 좋다. 아니면 식사 준비를 위해 연 냉장고 안에 달랑 콩나물 한 봉지밖에 없을 때 과거에 늘 그랬던 것처럼 외식이나 배달음식이 아니라 콩나물로 할 수 있는 세 가지 이상의 요리에 도전해 보는 건 어떨까? 

이미 현대미술에서는 형체가 없는 예술작품 또는 예술가의 선언에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있다. 기업들 역시 가늠하기 어려운 미래를 위해 보이지 않는 생각의 가치에 적극적으로 투자를 할 날이 머지않았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자신이 가진 생각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정성을 다할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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