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테이젼> 속 인물인 '토마스 엠호프'의 입장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가상의 일기입니다.
몇 시간만 지나면 힘들었던 2011년 한 해가 마무리된다. 만나서 더러웠고 두 번 다시 보진 말자는 심정으로 남은 시간을 흘려보내도 되겠지만, 딸과 같이 놀겠다는 나의 계획이 틀어져 버렸으니 이 시간을 나만의 시간으로라도 채워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집에서 내 딸이 썸남과 분위기 있는 음악 밑에서 블루스를 추고 있는데, 그걸 들으니 올 한 해 좀처럼 가기 어려웠던 재즈바에 온 것 같기도 해서 설레기도 하다.
딸이 이성에 눈 떠가는 모습을 이렇게 현장에서 제눈으로 감상하는 아빠가 이 세상에 채 몇 명이나 있을까? 이것도 MEV-1이라는 신종 바이러스 덕분에(?) 할 수 있는 색다른 경험인 것 같다. 건강을 지키겠다고 데이트를 집에서 하고 있는 딸에게도 고맙지만, 올해 수차례 있었던 내 문전박대에도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내 딸을 찾아온 저 남자애에게도 무척 고맙다. 백신까지 접종하고 온 자식이기에, 더 이상 문전박대할 명분이 없으니 흐뭇하게 지켜볼 뿐이다. 서로서로의 건강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저 아이가 이해해주길 바란다.
MEV-1로 인해 내가 사랑하는 처자식을 잃은 올 한 해, 저 큰 딸마저 없었다면 난 12월 31일을 이렇게 웃으면서 있을 순 없었을 것이다. 연초에 홍콩을 다녀온 와이프는 돌아오자마자 컨디션 난조를 보이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평소 건강하던 그녀였기에 믿기지 않았다. 사인도 분명하지 않았고 의사는 뇌염이 의심될 뿐이라고만 얘기했다. 시간이 지나 부검을 해보니 내 와이프는 그 전까진 존재하지 않았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었다.
감염률이나 치명률이 둘 다 높은 매우 위험한 바이러스로 확인되면서 이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세계 곳곳에 퍼졌다. 최초 감염자인 내 와이프의 동선도 모조리 역학 조사돼 난 와이프의 불미스러운 행적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것보다 와이프의 죽음 그리고 뒤이은 막내딸의 죽음이 내겐 더 좌절스러운 것이었다.
한편 호흡기 등을 통해 감염되는 것이므로 나는 정황상 감염되었어야 했지만 너무나 멀쩡했다. 당시엔 바이러스에 면역력이 검증된 유일한 인간이었기에 내 혈액을 이용하라 권유했지만, 이를 이용하지도 않고 백신을 개발할 정도의 사회인데 그들에게 내가 너무 으스대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올 한 해,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상실의 아픔을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조국 미국은 선진국의 모습을 막론하고 우왕좌왕의 모습이었다. 죽어나가는 환자 속에서 의료진들은 업무를 한때 파업했다. 보건 당국 책임자는 함구해야 할 봉쇄 사실을 자기 애인에게 몰래 알린 것이 드러나 논란을 일으켰다.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불안의 시대를 놓치지 않겠다는 똥파리 때들은 온갖 음모론을 인터넷에 올리며 여론을 쥐락펴락 했다. 특히 신종 바이러스에 개나리가 좋다는 주장을 근거 없이 펼치며 보건 당국을 괴롭히고 주가를 조작하며 이름을 알려 많은 돈을 번 인간도 있었다. 꼭 그런 개인들이 아니더라도 바이러스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환상 하에 각종 제약회사 주가는 끝없이 폭등하며 우리 사회의 비이성과 탐욕을 반영했다.
지역사회에서도 폐해는 만연했다. 내가 우리 딸이 저 남자애를 못 만나게 한 것처럼, 이웃과의 교류는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불시에 봉쇄령이 내려질까 두려운 주민들은 온갖 마트를 돌아다니며 사재기를 했다. 바이러스 감염 증상을 보이는 사람조차 마트를 횡보할 정도였다. 그러자 정부는 배급을 했는데 이마저도 양이 부족해 서로서로 뺏고 뺏기는 야만적인 모습이 보이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본 적 없었던 혼돈의 시대였다.
다행스럽게도 백신이 일찍 개발되었다. 오랜 시간의 임상 시험을 거쳐야 한다고 알고 있었지만, 워낙 위급한 상황이기에 그러한 절차를 간소화 한 덕분이었다. 듣기로는 백신 개발자가 동물 실험에서 백신의 유효성이 확인되자마자 자기 몸에 투약한 후 바이러스 보유자인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가 그 효능을 검증했다고 한다. 그때 무사했으므로 자신 있게 개발을 완료했을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을 구원한 영웅이 언젠가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주길 바란다.
백신 개발은 서둘러 이뤄져서 다행이지만, 이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이기에 아직까지도 내 딸은 백신을 투약받지 못했다. 얼마 전에 발표된 분배 방식은 참으로 경악스러웠다. 로또 번호를 뽑는 것처럼 정부 대표가 생일을 뽑는 것이 생중계되었다. 그 생일자의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접종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 그것밖에 없었을지 참으로 의문스러웠다. 지난번 봉쇄령 논란이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책임자들은 자기 것을 확보해 놓고 일반 시민들에게만 저러한 복불복 로또 방식을 강제하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별다른 대안이 없으니 이를 따르고 그때까지 조심하는 수밖에...
어쨌건 정리하고 보니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는 것이 실감 난다. 격변의 시대에 누군가는 소중한 가족을 잃었지만, 누군가는 떼돈을 벌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신뢰를 잃었지만, 누군가는 희생과 용기의 아이콘이 되었다. 나도 내 처자식을 잃은 큰 불운이 있었지만, 나 스스로 비교적 위험한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던 첫째 딸과 올 한 해 가까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2011년이 지나고 내년에는 점차 사회가 정상화되길 바란다. 그래야만 각자의 삶도 정상화될 것이다. 집에서 누군가의 데이트를 보면서 일기를 쓰는 건 딱 한 번만 경험해봄직한 일인 것 같다. 아마 딸도 계속 눈치 보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나도 있고 싶어서 있는 게 아니다. 이때쯤 되니 진짜 재즈바에 가서 술잔과 함께 신년을 맞이하고 싶다.
그나저나, 2011년에 이러한 일을 겪었으니 앞으로는 이런 바이러스 사태가 안 생기겠지? 혹시라도 생기면 그때는 좀 더 이성적으로 대응하려나... 아무튼 이런 일의 재림은 상상하기도 싫다. 우리 모두에게 행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