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도 언급했다시피, 나는 '서른'이라는 나이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의 서른이 그냥 평범하게 끝나버릴까봐 두려웠고,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난히 덥던 2018년 여름, 나는 부모님께 혼자 결정한 두가지 사항을 통보했다.
그것은 바로 '자취'와 '퇴사'였다.
나는 평생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아주 어린시절에는 작은 집에서 부모님과 나, 여동생이 함께 한 방에서 생활을 했고, 이후 이사를 간 집에서는 방 2개짜리 집에서 여동생과 함께 쓰는 작은 방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집의 크기가 행복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은 결코 아니겠지만, 그래도 내게는 언젠가 내 방을 가질 수 있다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두근거림이 있었다.
하지만 한 동네에 자리를 잡고 20년 가까이 자영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우리 가족에게 이사라는 것은 먼 이야기였다. 서른이 되어서도 여동생과 함께 쓰는 작은 방 생활에 나는 싫증이 났고, 결국 자취를 선언했다.
"엄마, 아빠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해서 생활해보고 싶어. 그래서 1년만 자취해보려구."
허락받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어렵게 부모님께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는 역시 반대를 하셨다. '평소에 가위도 잘 눌리면서 혼자 살면 어떻게 버티려고 하냐, 괜히 나가면 돈 쓰게 된다' 등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의외로 아버지는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이제 성인이니까 모든 일은 니가 스스로 결정해도 된다'라는 것이 아버지의 의견이었는데, 어찌보면 허락이라기 보다는 결정권 자체가 내게 있음을 일깨워주신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신이 난 나는 그 다음날 바로 부동산을 찾아갔고, 며칠 뒤 아버지와 함께 내가 얻은 작은 원룸을 꾸미기 시작했다.
대단한 척 '정서적 독립'이라는 단어로 포장했지만, 그것은 독립이 아니었다. 원룸을 채울 모든 짐들을 아버지께서 손수 옮겨주셨고, 커텐도 달아주시고, 멀티탭 정리도, 가구 조립도, 모든 것을 아빠가 도와주셨다. 미친듯이 더웠던 7월 중순, 아침부터 분주하게 내 이사를 도와주신 아버지는 오후가 되자 몇년은 늙은 듯 고생한 얼굴이셨고 우리는 함께 자장면을 시켜먹으며 웃었다. 창문도 크고, 햇볕도 잘 들어오는 참한 집을 잘 구했다며 아빠는 좋아하셨다. 서른이 다 된 나는 아버지에게 무언가 인정받은 것 같아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모든 이들에게 직업이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의 차원을 넘어선, 어쩌면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거대한 무언가가 아닐까, 라는 생각. 그런 생각을 했다. 바보처럼.
10대 시절부터 꿈이었전 문화기획을 하며 지역에서 활동하는 멋진 예술가들도 만나고 마을에서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하루하루 성장함을 느껴요"라며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지만, 사실은 모두 거짓이었다. 이미 마음은 텅 비어버린지 오래였고, 껍데기만 남아있었다. 하루하루 지쳐가고 있을 때, 이상한 생각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왔다. 나를 위한, 나에게 꼭 맞는 운명적인 일이 어디에선가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 나는 그것을 찾으러 떠나기로 했다.
"나는 이 회사와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만두고 여행가서 생각 정리 좀 하다 올게."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동안 여러번 혼자 유럽여행을 다녀왔으니 당연히 부모님께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냥 여행이 아닌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거의 800km를 걸어야 한다는 사실은, 장애물이 되었다. 어머니부터 시작해서 소식을 들은 사촌오빠까지 모두가 나를 말렸다. 여동생은 비행기 티켓 취소 수수료를 대신 줄테니, 얼른 취소하라고 매일같이 성화였다. 하지만 아버지만큼은 응원해주셨다.
내가 한밤중에 예행연습을 할거라며 배낭을 매고 등산화를 신은 채 집을 나설 때도, 아버지는 항상 배웅해주셨다. 씩씩하게 집 근처 대학교 한바퀴를 돌고 집에 도착할 때면, 집 앞에 서서 내가 오는 길을 살피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 계셨던 걸까.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나를 지켜주는 존재.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퇴사를 하고 두달간의 공백기를 자취방에서 가진 후 오랜만에 집에 와서 짐을 정리 하던 날 저녁, 아버지는 내 방에 노크를 하고 들어오시더니 하얀 봉투를 내미셨다. "바빠서 환전은 못했다. 공항에 가서 환전하고, 거기 있는 동안 든든히 챙겨먹어라." 봉투에는 30만원이 들어있었다.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보다 30만원이라는 꽁돈이 생긴 게 더 기뻤던 철없는 나는 그 봉투를 얼른 배낭 속에 집어넣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출국 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새벽 일찍 눈을 떴다. 간호사인 여동생은 나이트 근무라 집에 없었고, 부모님은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나 내 준비를 도와주셨다. 아버지의 등산잠바를 빌려입고, 아버지의 차를 타고 터미널로 갔다. 대구에서 인천공항까지 가려면 꽤 시간이 걸렸기에, 서둘러야 했다.
동대구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차에서 내려 손수 배낭을 내게 건네주시며 잘 다녀오라고 하셨다. 잠시 아버지를 안아드릴까 고민했지만, 쑥쓰러웠기에 평소처럼 밝게 인사만 하고 뒤돌아섰다. 무사히 순례를 완주하고 한국에 오면 안아드려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와 나의 마지막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떠나지 말 걸 그랬다. 아버지가 이렇게 빨리 떠나실 줄 알았다면,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걸 그랬다. 괜히 자취를 한다고 설치며 아버지를 피곤하게 하지 말 걸.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둬서 쓸데없는 걱정 끼쳐 드리지 말 걸. 순례길을 떠나면 두달간 못본다는 핑계로, 남자친구와 데이트하기 바빠 가족들에게 무신경했던 것이 죽을만큼 후회되었다. 그 시간에 아버지의 손을 한번 더 잡아드릴 걸. 그 때, 아버지가 내게 배낭을 건네주시던 그 때, 아버지를 그냥 보내지 말고 따뜻하게 안아드릴 걸. 다음으로 미루지 말 걸.
시간은 야속했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손수 정돈해주신 아늑한 자취방에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하루종일 열심히 짐을 옮겨주시고, 생수를 통째로 들이키던 아버지의 모습이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버지의 부재에 익숙해져가지만 가끔, 아주 가끔은 아버지가 내 방문을 노크하며 내 이름을 부르실 것만 같아서 멍하니 방문을 바라보기도 한다.
뒤늦은 후회, 넘치는 눈물이 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떨쳐버릴 수 없는 생각.
"이럴 줄 알았으면 떠나지 말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