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뒤로 커다란 살구나무와 밤나무들이 순서대로 피어나던 곳_ 딸기, 앵두, 참외 꽃이 피는 계절을 가르쳐주고 땅콩, 고구마 줄기처럼 따라오는 수확의 기쁨을 알게 했던 내 유년의 뜰,
나는 다섯 살부터 일곱 살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생계로 바쁜 엄마 아빠를 떠나 가장 ‘무난’한 내가 할머니의 집으로 보내졌다.
언니는 엄마의 일손을 도왔고, 동생은 어렸기에 엄마품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할머니가 유독 나를 예뻐했다고 말하는 건 엄마의 미안함을 덜고자 보탠 말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를 귀하게 여기고 특별히 예뻐하셨다는 사실을,
할머니는 5일장에 갈 때마다 내가 좋아할 만한 물건들을 들고 오셨다.
리본이 달린 머리끈, 레이스가 달린 반양말, 코가 반짝이는 검은색 에나멜 구두도 사다 주셨다. 그것들을 입고 놀러 가거나 자랑할만한 친구 하나 없었지만 할머니는 나에게 아낌없이 쌈짓돈을 풀었다.
또 어느 날은 두 번이나 버스를 타고 광주 시내까지 나가서 나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다 주셨다. 하얀 주머니 안에서 꺼낸 종이에는 ‘경림’이라는 이름이 두 번 적혀 있었다. 한자와 한글이었지만 사실 그때 나는 까막눈이였다.
새로 받은 이름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할머니에게 나는 꽤 오래 '경림이'라고 불렸다.
지금 너무도 흔한 내 이름 대신 그때 개명을 했다면 어땠을까…
가끔 후회되기도 한다.
할머니의 외딴집은 밤이 빨리 찾아왔다. 겨울에 가까워질수록 밤은 길고 조용하고 더 까맸다. 커다란 검정 무쇠솥이 두 개나 걸쳐진 부뚜막과 아궁이는 할머니와 내가 좋아하는 장소였다. 하루가 끝나갈 때쯤이면 무쇠솥에 물을 끓이고 아궁이안의 잔불에 고구마를 묻어두셨다. 그 곁에서 할머니와 매일 밤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다 기억나지 않지만 할머니 얼굴에 기분 좋게 번지던 주름 미소는 잊히질 않는다.
할아버지는 워낙 말수가 적으셨다. 아마도 내가 오기 전까지 우리 할머니의 대나무숲은 아궁이가 아니었을까... 가끔 부지깽이를 내려놓으며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던 할머니의 옆모습은 슬퍼 보였다.
겨울날, 새벽이었다. 밖에서 나는 부산스러운 소리에 일찍 잠에서 깼다. 할아버지의 외양간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고 입구가 반쯤 열려있었다. 외양간을 오고 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숨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조심스레 들어선 외양간에서는 어미소가 송아지를 낳고 있었다. 양수 주머니에 쌓인 송아지가 나오고 흠뻑 젖은 송아지를 할아버지가 이불로 감싸주고 있었다. 조금 뒤 옆에 있던 어미소가 가까이 와서 송아지를 핥기 시작했다. 송아지는 자꾸 쓰러지면서도 계속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썼다. 지금 스스로 일어서야 건강한 어미소로 살 수 있다는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온 마음 다해 송아지에게 응원을 보냈다.
막 태어난 송아지가 너무 크다는 사실과 태어나 바로 걸을 수 있는 모습을 직접 본 그 하루의 기억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할머니의 집은 동네와 한참 떨어진 외진 곳이었다. 비포장도로 위에 먼지를 일으키며 하루에 4번쯤 읍내 버스가 지나다녔다. 나는 멀리서 버스가 보일 때면 미리 달려가 할머니의 집 언덕 위에 버스가 멈춰주기를 기도했다.
버스가 멈추고 흙먼지가 사라지면 거기 엄마 아빠가 서 있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오는 엄마 아빠를 나는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 모두 정성껏 나를 챙겼지만 난 엄마품이 더 그리운, 다섯 살이었다.
그날도 엄마 아빠를 태운 버스를 아침부터 기다렸다. 땅 그림을 그리는척했지만 눈과 귀는 버스가 보이는 저수지 모퉁이를 향해 있었다.
엄마 아빠 품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면 더 집에 가고 싶어졌다.
또 헤어질 생각을 하면 아침부터 슬펐고, 엄마가 나를 두고 갈까 봐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이번엔 나도 함께 집에 가는 거겠지?..
열 밤도 지났고, 또 열밤도 지났으니...'
내 물건들과 옷들을 야무지게 챙겨두고 잠이 들었다.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내가 둥글게 마주 앉아 먹던 밥상에서 나는 처음으로 꽉 찬 행복감을 느꼈다. 할머니의 외딴집에 그날은 따뜻한 노란 등이 켜지는 순간이었다.
엄마 아빠가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할머니를 안아드리고 할아버지께 감사 인사를 하고 나도 떠날 셈이었다. 할머니가 다급하게 외양간 옆 창고로 나를 불렀고, 나는 그곳에 갇히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을 알아차렸지만 엄마 아빠를 태운 버스는 눈앞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이미 저수지 모퉁이를 돌아서고 있는 버스를 눈물범벅이 되어 따라갔다.
영화 속 장면처럼 버스는 멈추지도 않았고 할머니는 나를 향해 달려오지도 않았다.
내 작은 몸에서 눈물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할머니는 언덕 위에 서서 바라봤고 이미 사라진 버스뒤를 나는 고집스럽게 따라갔다.
먼지와 눈물과 상처로 범벅이 된 나는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할아버지도 다 미웠다.
할머니의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고 아직 빛이 남아있는 저수지를 향해 계속 걸어갔다.
나를 두고 간 엄마 아빠에게 걸어서 갈 수 있다고 믿었다. 모퉁이를 돌자 저수지의 전체가 눈에 들어왔고 7월의 석양빛이 연꽃과 연못 위에 뿌려져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말도 안 되게 탐스럽게 핀 연꽃들을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나는 또 한 번 으앙 하고 목놓아 울었다.
눈물과 석양빛에 엉켜졌던 그때의 연못과 매우 닮았다.
석양이 질 때면 여전히 쓸쓸하고도 허전한 그리움은 그때 스며든 것일까…
할머니는 2년 전 돌아가셨고 유언대로 한 줌 재로 뿌려지진 못했다. 할아버지 곁, 할머니의 외딴집 근처_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 너머에 할머니가 계신다.
저녁노을이 질 때면 할머니도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시절, 그 풍경을 그리워하실 것만 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계절앞에 와 있다. 아카시아 꽃이 활짝 핀 요즘, 마음안에 조등弔燈을 켜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