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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미랑 May 11. 2023

엄마의 국자

어쩌면, 싹을 틔웠을지도 몰라.

꽁꽁 묻어놓은 오래전 이야기다.

30년도 더 지났지만 공소시효가 끝났다고 지은 죄가 없어지진 않는다.


구멍가게 안쪽에 딸린 엄마의 작은 부엌은 언니와 나에게 완벽한 놀이터였다. 아침햇살이 비치거나 비 오는 풍경을 담아내는 창문 따윈 없었지만 처음 보는 엄마의 살림들을 가지고 우리는 그 안에서 진짜 소꿉장난을 시작했다. 엄마의 물건들은 그때도 참 유난히 반짝반짝 빛이 났다. 예쁜 엄마가 하얀 광목천 위에 자줏빛 꽃무리들이 앙증맞게 둘러진 앞치마를 입고 나타날 때면 눈이 부셨다. 엄마는 그 앞치마를 아끼며 특별한 날에만 입었고 언니와 난 서로 입어보겠다며 자주 다퉜다.








낮고 좁은 통로를 따라 부엌 안쪽으로 들어가면 안방과 통하는 문이 하나 있었고, 그 옆으로 내 키만 한 연탄 화덕이 놓여있었다. 엄마는 자다가도 연탄불을 잊지 않았고 꺼뜨리는 법이 없었다. 어린 나는 시간도 보지 않고 연탄불을 지켜내는 엄마가 너무도 신기했다. 엄마는 연탄불에 계란찜도 만들고, 바지락탕도 끓이고, 밥도 안 태웠다. 3구짜리 인덕션을 가지고도  3가지 요리가 버거운 나는 여전히 엄마가 위대해 보인다.


어느 날 엄마가 긴 외출을 했다.

한참 달고나 만드는 재미에 빠져 있던 언니와 나는 그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엄마 허락하에 만들 수 있는 달고나는 숟가락 크기가 전부였다. 달고나로 남아나는 숟가락이 없자 아예 전용 숟가락을 정해주셨다. 엄마가 있을 때만 연탄불 근처에 갈 수 있었는데 그날 우리는 선을 넘었고, 엄마의 커다란 국자에 달고나를 만들기로 작당했다. 아무리 보아도 새것 같은 엄마의 국자가 맘에 걸렸지만 달고나를 만들어서 양껏 먹고 싶었다.

마침 연탄 화덕 뚜껑 끝까지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엄마의 새 국자에 흰 설탕을 양껏 붓고 베이킹소다를 함께 넣어서 저었다. 연탄불 위에서 진한 캐러멜 향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숟가락과는 비교도 안 되는 넉넉한 양과 달큼함에 언니와 나는 소리 지르며 방방 뛰었다. 나무젓가락 끝으로 돌돌 말아서 물방울 모양의 달고나를 만들거나 그 위에 누군가의 이름을 적었던 것 같다. 연탄불 위의 달고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드럽고 진한 물감 형태로 변했고, 언니와 나는 조심스럽게 달고나를 은색 쟁반에 부었다. 별 모양 틀은 없었지만 숟가락 뒷면을 이용해 각자의 솜씨를 뽐내며 즐거워했다. 언니가 환하게 웃을 때 몸에서 달고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놀다 보니 엄마가 돌아올 시간이 다 되었다.


그런데 국자가 문제였다. 국자에 달라붙어 식어버린 달고나는 긁어도, 닦아내도 소용이 없었다. 거친 수세미로 손끝이 얼얼하도록 힘을 줘 닦아도 새 국자는 살아나지 않았다.

순간 두려웠다. 어쩌지... 엄마의 앞치마처럼 아끼는 물건이면 어쩌지...

우리는 국자를 들고 어찌할 줄 몰랐다. 해가 지고 있었다. 눈물이 났다. 엄마의 귀한 물건을 망쳐버렸다는 죄책감과 실망할 엄마 얼굴을 떠올리니 너무 무섭고 내가 미웠다.


결국 언니와 나는 국자를 땅에 묻기로 했다. 일단 숨길 생각이었다. 엄마가 국자를 못 잊고 슬퍼하면 다시 내줄 생각이었다. 엄마는 당신의 건망증을 탓하며 새 국자의 행방을 더는 가족에게 묻지 않았다. 상상도 하지 못하셨을 테니까...

국자는 그렇게 오래도록 묻혀 있었다.

내가 기억해 주지 못하는 동안 국자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유년의 집에서 이사하면서 까마득히 멀어져 갔다.





돌을 땅에 묻고

물을 주면

싹이 돋을까

누나한테 물었더니

누나가 씩 웃으면서

싹이 돋는다고 해서

영월 동강에서 주워 온 돌멩이 하나

꽃밭에 묻고

가끔 물을 준다


<정호승 동시집_참새 중에서>


어쩌면 싹이 피고도 남았을지도 몰라




어느 날  우연히 읽은 시를 통해

잊혔던 엄마의 국자를 떠올리며

나는 국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어릴 적 살던 부안군 계화면  274번지,

엄마의 부엌 뒤편 작은 마당

흙더미 아래,

지금도 국자는 묻혀있을까...


삼십여 년이 지났지만 언니와 함께 가서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

엄마에게 제대로 쓰이지도 못하고 달고나가 눌어붙은 채 땅 속에 묻혀버린 국자를...



#엄마의 국자 #국자를 묻었다 #달고나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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