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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기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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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Oct 04. 2023

41. 독박육아 2

아기랑 둘이 명절연휴 보내기

이제는 하루이틀 일이 아니긴 하지만 또! 남편이 나와 아기 둘만 남기고 일터만 떠났다. 예전에 남편과 같은 직장에 다니는 아빠를 둔 어린이가 나에게 "우리 아빠는 크리스마스에도 없어요. 설날에도 없고 추석에도 없어요." 하더니 내가 딱 그 꼴이다. 아기가 있기 전에는 그런 일이 있어도 그러거나 말거나 내 휴일을 마음껏 즐겼는데 아기가 있으면 둘만 이런 연휴를 보내는 게 참 힘겨운 일이다. 심지어 6일간의 긴 연휴 동안 단 한 시간도 남편이 집에 오지 않는다니 정말 너무한 게 아닌가?


저번 15일간의 독박육아와는 다르게 그래도 이번엔 남편이 매일매일 저녁마다 아기 국과 반찬을 준비해야 하는 날 위해 준비를 철저히 해주었다. 오징어와 전복을 손질해 얼려두고, 닭 한 마리를 고아서 육수를 내고 고기도 소분해 주고, 곰탕 집에서 곰탕과 삶은 양지를 사 와서 소분해 주었다. 아침으로 먹일 전복죽과 삼계죽도 만들어주었으니 남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긴 한 거다. 아기 식단도 같이 고민을 해주었으니 나름 이번 연휴에 대비를 철저히 한 셈이다.


그리고 이번엔 8월에 비해 날씨도 확실히 선선해졌다. 바깥활동을 하기 좋은 날씨가 되었단 얘기다. 물론 어딜 가나 사람이 미어터지고 가족들과 북적북적 다니는 일행들에 비해 단출한 나와 아기는 어딜 가나 치이긴 하지만 집 안에 갇혀서 아기의 짜증받이가 되는 것보단 얼마나 나아진 일인지. 그래서 연휴 동안 근처에 아기와 갈만한 곳들을 검색해 운영일과 운영시간을 알아보고 나름의 계획을 짰다. 그래야 아기를 재우고 내일은 대체 뭘 하면서 놀아야 하나 하는 막막함이 덜 하니까.


하지만 연휴 첫날부터 위기가 왔다. 전날까지 멀쩡하던 아기가 갑자기 콧물이 줄줄줄 흐르는 게 아닌가. 연휴에는 소아과도 미어터지는데! 그래도 연휴 중간이 아니라 연휴 첫날에 아프기 시작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소아과에 다녀왔다. 다행히 열도 안 나고 콧물만 나는 코감기라서 5일 치 약을 받아왔다. 그러나 진정한 위기는 약이 다 떨어진 연휴 마지막날에 왔다. 망할 아이폰 XX가 그때 딱 시계 오류가 나서 1분 오차가 생겨버린 거였다. 어쩐지 집 전자시계와 폰 시계가 달라서 이상하더라니 설마 폰 시계가 오류가 난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나. 덕분에 순번이 저 끝까지 밀려서 무려 164번이라는 경이로운 순서에 당첨됐다. 마지막 순번이 190번대였다고 하니 꼴찌는 아니어서 다행인 건가... 결국 우리 아기 낮잠시간이 넘어가는 것을 초조한 마음으로 까까를 먹여가며 버틴 결과 진료를 보기는 봤다. 늘 그렇듯이 또 중이염 당첨돼서 항생제를 받아왔다. 어휴 기 빨려.


그래도 이번 연휴는 어느 정도 할만하긴 했다. 첫날은 가볍게 소아과 투어와 집 앞 산책을 했고 둘째 날은 마침 명절 연휴 내내 무료개관을 하는 박물관에 갔다. 그 박물관은 아기가 좋아할 만한 체험관과 놀이시설이 있어서 가끔 가는 곳이었는데 사람이 북적일 시간을 피해 9시에 개관하자마자 들어가서 사람이 많아지는 10시 반에 나와 집에서 점심 먹이고 낮잠을 재우니 얼마나 깔끔하던지!


세 번째 날은 외할머니 댁에 다녀왔다. 나는 아기와 둘이 장거리 운전을 해본 적이 없고 가뜩이나 멀티가 안 돼서 뒷자리에 아기가 울기 시작하면 시내주행에서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편이라 시외권으로 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성인들 간의 대화가 그리웠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기와 하루종일 둘이 붙어있으면 아기의 요구에 관련된 입력출력만 해야 하는 게 질리기도 하다. 다행히 내 주변에 가장 가깝게 사는 친척이 우리 할머니고 자동차 전용도로로 달리면 30분 거리라서 처음으로 용기를 내봤다. 다행히 우리 아기는 동요 메들리를 틀어주니 왕복 1시간을 춤도 추고 옹알이도 해가면서 잘 버텨냈다. 나 역시 할머니 댁에 가서 마당에 누워 자는 고양이들을 멍하니 구경도 하고 오래간만에 밥 다운 밥을 밥때가 돼서 천천히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네 번째 날은 어제의 긴장과 지난 연휴들의 피로가 쌓인 건지 약간 컨디션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5일장이 서는 날이라 아기와 둘이 시장 구경을 다녀왔다. 명절 다음 장이라 규모가 작긴 했지만 아기랑 간식도 사 먹고 이것저것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서 다닐만했다. 그리고 우리 아기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새끼제비 마냥 입을 최대치로 벌리고 손가락으로 자기 입을 가리키면서 "아, 아!"라고 크게 외치는데 그 장면을 본 상인들이 빵 터지셔서 너무 민망하면서도 웃겼다. 심지어 고구마 앞에서도 자기 입에 넣으라고 그러는 통에 그걸 본 상인 한분이 삶은 고구마 한 개를 맛보기로 쥐어주셨다.


다섯 번째 날은 집안에 쟁여둔 식재료가 동이 나서 어쩔 수 없이 장을 보기로 했다. 여기도 사람이 북적거릴게 뻔했기 때문에 오픈시간에 맞춰서 아기와 방문했지만 아기의 흥미를 끄는 온갖 이벤트들 덕분에 내 정신력이 탈탈탈 털렸다. 시작은 아침을 못 먹고 나온 내가 맥도널드에 들리게 되면서였다. 내가 먹는 사이에 아기 간식을 주었는데 간식이 원하는 만큼 집어 지지 않는다고 엉엉 울지 않나, 깜박하고 빨대컵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푸드코트 쪽에 있는 컵으로 물을 먹였더니 그 물로 가글을 하는 덕분에 물바다다 돼서 바닥을 닦게 만들지 않나. 과일을 사려고 과일 코너에 갔더니 키위를 당장 본인 입에 넣으라고 오열을 하고 식기 코너를 지나가다가 뽀로로 수저포크 세트를 발견해서 그걸 당장 꺼내달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정신이 쏙 빠져서 장은 거의 보지도 못하고 얼른 필요한 것만 사서 나왔다.


연휴 마지막 날, 이 날은 도저히 외출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소아과 대기번호 뽑기에서도 실패한 데다가 연휴 동안의 피로가 몰려와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기는 에너지를 분출하지 않으면 먹지도 자지도 않는 법.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낮잠은 평소의 반도 안 자고 일어나서 짜증을 있는 대로 부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후에는 집 앞 산책을 나갔다. 나가서도 푸쉬카를 꼭 가지고 나가야 한다느니 자기가 그걸 밀어야 한다느니 해서 진을 쏙 빼놓다가 고양이 찬스 덕에 좀 살맛이 났다. 우리 아파트에는 덩치가 강아지만 한 큰 고양이 한 마리가 있는데 늘 사람들 많이 다니는 길목 잔디에 누워서 잠을 자곤 한다. 오늘은 이 고양이 밥을 챙겨주는 아주머니 한분이 고양이를 밀가루 반죽처럼 주무르고 계셔서 한번 가봤더니 이 고양이가 사람 손길을 좋아하니까 만져도 괜찮다 하셨다. 그런데 어쩜 정말 사람을 좋아해서 나와 아기 손길에도 골골거리고 내 다리와 아기 푸쉬카에 엉덩이를 비비며 친근하게 대해 준 덕에 그날 오후 산책을 평화롭게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사실 내 독박육아는 이날 저녁 시간에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아기와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니 남편이 일정이 꼬여서 다음날 저녁에나 돌아온다는 게 아닌가. 작업복을 입고 꼬질꼬질해진 채로 영통 하는 남편에겐 차마 화는 못 냈지만 속이 다 부글거렸다. 그래서 처음으로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다. 원래는 아기와 나 둘이 있을 때는 배달을 시켜 먹어 본 적이 없었는데 풀리지 않는 화를 쏟아낼 곳이 없으니 폭식이라도 하는 수밖에. 와인 글라스 하나도 뜯었지만 이것 때문에 또 다음날 육아가 꼬이면 안 되니 1/3만 마시고 그만두었다. 인생이 좀 지겹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름 아기와 둘만 있어서 좋은 점이라고 한다면 나와 같이 보내면서 바깥 경험을 많이 한 덕인지 사물인지가 쑥 큰 게 느껴졌다. 과거의 경험을 이야기하면 그때 당시의 흉내를 내본다던지, 바깥을 가리키며 사물이나 동물 단어를 말하기도 했다. 지난달에 사둔 전집도 많이 읽었다. 산책하면서 강아지, 고양이, 새, 거미 이런 동물들을 보았더니 책에 나온 것들과 연결해서 기억하기도 하고 시장이나 마트 가서 본 채소들의 이름을 알려주었더니 책에서 찾아보게 했더니 곧잘 연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복을 무척 좋아하는 연령답게 같은 책을 열 번, 스무 번씩 읽는 일은 내 입과 정신에 피로가 쌓이는 일이긴 했지만 반복한 만큼 내용의 흐름을 어느 정도 인지하는 것이 보여서 인간이란 참 신기한 동물이구나 싶었다. 


어쨌든 드디어 오늘은 아기가 등원을 해서 나에게도 휴식 시간이 생겼다.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내자마자 첫 코스는 그토록 거슬렸던 차 앞유리에 묻은 새똥을 닦으러 자동세차장에 간 거였다. 차가 깨끗해지니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그리고 오래간만에 좋아하는 브런치 가게에 가서 혼자 카푸치노와 브런치세트를 시켜 한 시간 반 동안 여유를 즐기니 속이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오래간만에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도 시간이 더 남았으니 이제 아기 있는 동안 제대로 못 했던 집안 묵은 때 벗기러 가봐야겠다. 오늘도 인생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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