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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기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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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Feb 17. 2024

49. 두 돌맞이 여행

이제 내 복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마침 아기의 두 돌 생일도 다가오고 남편의 휴무도 타이밍이 맞아떨어졌다. 이제껏 여행 갈까, 말까만 고민하다가 결국 못 간 날이 많았다.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번에 여행을 가지 않으면 언제 비수기 평일에 여행을 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행 날짜만 정해놓고 어디를 갈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가까운 근교로 여행 가기로 정했다. 그런데 여행 준비가 설레지 않았다. 여행 떠나기 1시간 전, 목적지를 바꿨다. 장장 3시간 반을 떠나야 하는 부산으로.


이제껏 여행 가기 망설였던 이유는 아기의 컨디션과 수면스케줄 때문이었다. 아기 50일, 100일, 6개월 때 신나게 여행을 다녔던 과거를 뒤집는 사건은 첫돌 여행이었다. 아기의 돌을 맞아 1시간 반 거리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가 지옥을 맛봤다. 아기는 낮잠을 전혀 자려고 하지 않았고, 바뀐 잠자리에서 밤잠마저 제대로 자지 않았다. 심지어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중이염에 걸려 크게 아팠고 그 이후부터 한 달간 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마음 졸이는 날들이 이어졌다. 아마 돌치레와 겹쳐진 탓이었겠지만 그때의 강력한 한방은 여행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래도 18개월쯤 용기를 내 1시간 거리의 1박 2일 호캉스를 도전해 봤다. 이번에도 결과는 참패였다. 밤잠에서 다시 지옥을 맛봤고 원룸형 호텔방에서 우리 부부는 제대로 된 육퇴시간도 즐기지 못했다.


이 두 번의 실패 경험을 바탕으로 두려움만 커진 우리 부부는 내 육아휴직과 남편의 무수한 평일 휴무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여행 한 번을 갈 생각을 못 했다. 그래도 이번엔 너무너무 갑갑했다. 마침 날씨도 좋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떠나보기로 했다. 대신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하나는 대도시로 갈 것, 다른 하나는 잠을 편하게 잘 수 있는 곳일 것. 첫 번째 원칙은 아기와 함께 여행 가면서 생기는 병원 문제와 식사 문제를 수월하게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 원칙은 아기뿐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의 여행의 질을 위해셔였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선택은 우리에게 정말 선물 같은 시간을 주었다.




출발할 때는 중간에 휴게소에 한번 들러 점심을 먹었다. 집에서 점심을 먹느라 드는 시간을 아끼고 이동 중에 아기를 한번 쉬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점심 메뉴는 우동. 우리 아기는 다른 건 몰라도 면을 거부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휴게소에서 먹을 음식이 우동밖에 없는 것도 한몫했지만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낮잠을 자며 이동시간을 버텼다. 2박 3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는 점심을 먹고 출발했다. 여행의 흥분 때문인지 낮잠을 잘 안 자려고 하길래 고군분투했는데 의외의 스킬이 효과가 있었다. 바로 코골이 ASMR이었다. (남편이 이걸 처음 틀었을 때는 본인 코골이를 녹음해서 들려주는 줄 알았다.) 덕분에 오는 길 낮잠을 푹 자며 돌아올 수 있었다.


숙소는 아파트형 호텔이었다. 호텔이라기엔 에어비앤비 같은 시스템이긴 했지만 우리 집과 비슷한 구조에 거실 있고 방 3개인 것이 마음에 들었다. 중간 방 침대가 벽에 붙어 있는 것도 좋았다. 비슷한 가격의 호텔에 가면 원룸형이거나 아니면 돈을 주고 스위트룸에 묵어도 겨우 방 하나에 거실이 붙어있는 구조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공간이 넓어지니 확실히 아기도 편안하게 놀 수 있고 잠을 재우기도 쉽고 무엇보다도 아기가 자고 난 뒤 부부간 제대로 된 대화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아기가 이 숙소에서 편하게 있어준 덕에 지난 여행들에 대한 공포가 많이 사라지고 자신감이 붙었다.


여행 일정은 아기와 함께 가는 거니 이동시간이 짧고 체험형 위주로 오전 1,2개 오후 1,2개만 소화했다. 이 넓고 놀 것 많은 도시에서 수많은 선택지들을 즐기지 못하는 건 조금 슬프긴 했지만 이번 여행에도 아프면 여행 자신감이 뚝뚝 떨어지니까. 덕분에 아기는 아픈 곳 없이 즐겁게 여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간에 돌아와 낮잠을 숙소에서 잔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두 번째 날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오전 일정이 힘들었는지 휴식이 더 필요해서 충분히 쉰 다음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체력적인 서포트를 해준 점도 이번 여행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원래도 허약했지만 아기 낳고 체력이 바닥을 기는 나와 활발해 보이지만 조금만 무리하면 열부터 나는 우리 아기 조합에서 남편이 하드캐리하느라 정말 애썼다. 특히 첫날 나와 아기가 지쳐서 잠든 동안 혼자 다음날 일정을 짜고 아침에 일어나니 열정적으로 계획을 브리핑한 남편의 모습은 정말 리스펙할만 했다.


아기가 두 돌이 되니 편안해진 점 하나는 여전히 선택지는 좁지만 먹을 수 있는 식당의 스펙트럼이 훨씬 늘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지역에서만 즐길 수 있는 유명한 먹거리들을 충분히 가보기엔 무리가 있어도 이젠 아기의자 없는 식당에 갈 수도 있고 자극적인 음식만 아니면 맛있게 먹는 아기의 모습도 볼 수 있었던 점이 충분히 행복했다. 


이것저것 체험할 공간에 가서 행복해하는 아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점도 좋았다. 확실히 스스로 걷고 뛰고 탐색하고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는 연령대가 되니 나가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좋은 것을 보면 즐길 줄 알고, 떼를 쓸 때 협상이 가능해지기 시작하고 어떤 게 즐거웠냐고 물어보면 정확히 대답을 해주기도 했다. 오늘 여행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여행 때 있던 인상적인 경험을 말하는 것도 신기했고 자기 전 여행 내내 함께 했던 미아방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바다, 기차를 말하는 아기의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새로운 경험이 아기의 경험도 마음도 확장해 준 느낌이었다.




이런 좋은 경험을 복직 직전에야 하다니 이렇게 아쉬운 일이 있을까. 그래도 엄마가 바빠지기 전 가족과의 추억을 만들어서 행복했고 주말이나 연휴에 조금 밀리더라도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당일치기 말고도 아기와 이곳저곳 재미있게 다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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