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사회 그리고 나
믿음과 회의는 반대말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를 보완해주는 말이다.
회의, 혹은 의심이 없는 믿음은 둘 중의 하나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믿음이거나, 혹은 무엇을 믿는지 생각해보지 않는 맹신이거나.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믿음은 '믿어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납득이 되었는데 왜 납득이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은 선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 믿음의 실체를 찾아가는 신앙의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고상한 믿음은 값싼 종교행위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내 인생에 있어 첫 신앙에 대한 회의는 고3 때 찾아왔다. 소위 '기도 응답'이라고 하는 것이 실상은 프로파간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하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이라 하고, 시간이 걸려 이루어지면 지체된 기도 응답이라고 하는 게 다 끼워 맞추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일어난 일을 하나님을 끼워 넣어 '기도 응답'이라고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은 이내 내가 어쩌면 평생 속고 살았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때 거리를 걸으며 하나님께 기도했었다. 내가 이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심히 살아왔었는데,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지금 나한테 말씀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이제 나는 내 갈길 가겠다고. 뭐 엄청난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정말 아무 일도,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속고 살았구나 하고 씁쓸해했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첫 대결(?)은 너무나도 싱겁게 끝이 났다. 하나님께 선전 포고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났었나, 길을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면에서 묵직하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내가 여기 있다."
좀 허무했지만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계속 따라가기로 했다. 나의 첫 반항기는 이렇게 지나갔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고3이던 학생은 대학과 대학원을 나와 연구자가 되었고 한 아내의 남편, 그리고 아빠가 되었다. 많은 신앙의 경험들과 사건들을 겪으며 '하나님'이라는 분을 예전보다 더 깊게, 입체적으로 알아갔고, 그분을 믿는 믿음은 더욱 견고해져 갔다. 특히 영적인 영역에서의 경험(혹은 체험)들은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하지만 교회에서 봉사하고 사람들을 돌보느라 묻어두었던 질문들도 있었다. 생각을 해봐도 금방 답이 나오지 않아 나중에 더 생각해 봐야겠다고 묻어둔 질문들이었다.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든 깨닫게 해 주시겠지 하는 마음이었다고 해야 할까. 지금 생각해보면 애써 외면했었던 질문들이었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가 터지고 모든 일상은 멈추었다. 교회 예배도 마찬가지로. 매주 교회에 가고 예배를 드리던 모멘텀이 멈추고 고요해지자 눌러두었던 질문들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감당이 안 될 정도로.
그 질문의 시작은 한국 교회였다. 미리 말하지만 난 주일 성수를 목숨처럼 여기는 한국 교회의 풍토와 더불어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그 교회 안에서 핵심 멤버로 몸을 불살라 활동했었다. 하지만 열심있는 활동들이 내 마음속의 이 질문에 답을 하진 못했다.
이 질문에 대해 교회에선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을 예로 들며 매일의 밥이 딱히 티가 나지는 않지만 필수적인 것처럼 예배도 그러하다고 말한다. 매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시간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난 이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실제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주일 예배 후에 마음이 달라지는 건 확실하니까.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한국 교회가 보여준 행태는 기독교에 대해 근본적인 의구심을 가지게 했다. 기독교 세력이 극우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백신에 대한 가짜 뉴스를 퍼트린다던가, 색깔론에 매몰되어 자신이 하는 설교가 목회자 자신의 전문성(신학)을 넘어서는 영역(정치, 과학)을 침범한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던가(혹은 알면서도 고의로 밀고 나간다던가), 또 신도들은 그러한 목회자들을 맹목적으로 따라 궁극적으로 팬데믹 방역에 큰 물의를 일으키는 것을 보며 우리 한국교회가 잘못되어도 굉장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체감했다. 개신교나 신천지나 행위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었다. 서로 자신이 믿는 것을 참이라 여기고 그 지도자가 가라는 방향으로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집단들일 뿐이었다.
웃프게도 내가 있던 미국 또한 트럼프를 추종하는 기독 세력이 백신 반대 전선을 구축하고 반지성(혹은 무지성)주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코로나를 영접하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책임을 돌리려 노력하였고, 일부는 국회까지 쳐들어가는 야만을 저질렀다.
뭐랄까, 한국과 미국에서 소위 기독교인들이 벌이고 있는 행태가 중세시대의 십자군의 행태와 오버랩되어 보였다. 정치인들의 야욕의 도구로 종교가 이용당하는 실상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절망감이 밀려왔다. 왜,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앞서 사회를 어지럽히고, 무지하며, 믿음이라는 명분 아래 이렇게 무자비한가?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초대 교회에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성도들이 믿었던 동일한 하나님인데 어찌 오늘날의 교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이익집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전락해버렸는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한국 교회가 정치 세력과 결탁한 것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뿐이지 사실 한국 교회는 독재 정권 때부터 극우 정치 세력과 공생해왔다(이 얘기를 제대로 시작하면 너무 길어지니 다른 글에서 다루는 것으로). 크게 양보해 교회의 생존을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치더라도 그러한 극우의 씨앗은 점점 자라 한국 대형교회들의 주류를 이루었다.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한 모던한 건물 안에 세련되게 포장한 예배와 훈련 프로그램들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빨아드렸다. 그렇게 한국 교회는 '부흥'했고 한국 교회는 한국의 주류 종교로 자리 잡았다.
이 부흥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그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현실세계에 나타나는 것, 즉 공의가 강물같이 흐르며, 사랑이 허다한 것을 덮는 나라다. 이런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상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만약 한국 교회가 조금이라도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최소한 기독교가 개독이라고 불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실상은 교회 안에선 어떠한 사회적 담론도 '빨갱이'와 '동성애'를 이길 수 없다. 현시대의 아젠다를 어떻게 성경적으로 해석할지 씨름해야 할 신학자들은 보이지 않고 소수의 선지자적 목소리를 내는 자들은 이단으로 낙인찍혀 내쳐진다. 기시감이 느껴진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에게 이런 취급을 당하시지 않았는가?
난 이번 코로나가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게 주셨던 마지막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항상 가르쳐 왔건만, 그것을 정말 삶으로 구현하는지를 하나님께서 시험하셨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이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고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오히려 정부가 교회를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정부 탓을 하는 자들을 보며 이미 하나님의 심판은 시작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교회에 선한 것이 있지 않는가 하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았다. 보이지 않게 활동하는 교회들도 많을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살아가려는 성도들과 목회자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어둠의 영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도 있을 것이다. 지친 영혼들이 회복하고, 절망에 빠진 자들이 소망을 얻는 일이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다수인가? 그렇지 않다. 어디까지나 선한 일부일 뿐. 어느 집단에도 선한 일부가 있다. 그 집단이 지향하는 방향성이 무엇인가가 중요한데, 한국 교회는 그 지향점이 하나님이 아닌 교회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교회 수호'가 우상이 되어버린 이 아이러니하고도 참담한 현실 앞에 나는 무기력했고 그 뿌리가 너무 깊다는 사실에 비통했다.
이쯤 되니 내가 애써 무시했던 질문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기독교인은 영어로 Christian이다. Christ+ian, 즉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란 말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한 구세주인 것을 믿으며, 다시 오실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들이 기독교인들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초림 이후에 성령을 보내주셨고, 그 성령의 조명하심을 의지하여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을 분별하며 살아가려 노력한다.
하지만 많은 교회들이 이데올로기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반지성을 넘어 무지성으로 행하는 것을 보며 진정 기독교가 참 종교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나와 같이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는 자들일 텐데, 어떻게 이렇게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며 이념에 사로잡혀 반대편을 저렇게 맹목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지, 귀를 막아도 어떻게 저렇게 꽉 막고 달려들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하나님은, 저들에게 말씀하시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쌓여가다 보니 교회(사람들)가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삐딱하게 바라보면 서양의 제국들은 기독교를 앞세워 식민지배를 했고 미국의 경우 노예 제도를 합리화 했다. 앞서 말한 십자군 전쟁같이 정치인들이 우매한 민중들을 선동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기독교가 진정 참 종교라면 이런 거대한 악의 흐름을 막으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오히려 선봉에 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만행을 저지른 흑역사를 우린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기독교는 옳지만 사람이 악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악을 변화시키는 힘조차 없는 무력한 종교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삐딱선을 타다 보니 나의 믿음이 시작된 바로 그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이 질문을 하는 동시에 수많은 무신론자들이 어떤 심정으로 이 질문을 했는지 이해가 됐다.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고 신의 뜻대로만 살아가는 수동적인 종교인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아니오라고 대답하고 독고다이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번뇌했을 그들의 입장이 공감되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있다손 쳐도 눈에 보이지 않고 또 이해할 수도 없는 '신'이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인지영역 외의 세상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다고 답을 하는 것이고 오감의 세계 이외의 세계를 믿는(혹은 보는) 사람들은 초월적인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사실 이 질문은 나에게 아주 잠시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답은 명확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내 평생에 걸쳐 경험했기 때문에 이 질문 자체를 한다는 것은 그저 나의 앙탈일 뿐이었다. 당신이 계신 것은 아는데 왜 세상은, 또 당신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 모양 이 꼴인지 한탄에서 나온 질문이리라.
항변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형통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지 않았냐고. 하지만 정작 현실은 이 세상에 가득한 악으로 인한 죽음과 고통에 믿는 자들도 예외는 아니며 하나님을 믿어도 형통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고.
절규했다. 그리스도인들이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어떻게 도울지 궁리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을 밟고 올라가는 현실이 너무 슬프다고. 왜!! 진정 약자의 편에서 정치를 하려는 자와 복수의 정치만을 외치는 자 하나 구분 못하는 무지성주의의 표본이 한국 교회가 되어버렸냐고.
너무 마음이 아프면 무감각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나는 2년을 예배도 드리지 않았고 기도도 하지 않았다. 아주 가끔 하는 기도가 있었다면 나의 회복은 이제 하나님께 달려 있으니 알아서 하시라는 건방진(?) 기도였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추억이 없었다면 진작에 무신론자, 아니 극렬 안티 기독교가 되었을 사람 기도 치고는 나름 젊잖은 기도였다.
올해 여름부터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었다. 예배를 드릴 심산이 아니라 아내와 루하가 너무 고립되어 있어 한인 커뮤니티가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교회를 나가봤지만 설교를 들어보고 다시는 올 곳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 말씀에 진지한 교회를 따로 찾아 나가게 됐다.
몇 주를 나갔을까, 예배가 진행중인 본당 안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그 날의 주일 본문 말씀이 예상치 못하게 훅 치고 들어왔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브리서 6:4-6)
흑화 되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이 위로를 해 주실 줄 알았는데 말씀으로 경고를 하신다. 특히 저 하일라이트 부분은 하나님이 밑줄을 쫙쫙 그으시며 경고하시는 느낌을 받았다. 삐딱하게 앉아 있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때까지 뻐팅겼으면 됐다고, 적당히 하라는 꾸지람이었다. 이건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경고의 말씀이라는 게 문제지만 어찌 됐건 하나님이 2년 만에 직접적으로 하신 말씀이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뾰로통한 마음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아내와 루하를 보러 한국을 짧게 다녀왔다. 그런데 그 짧은 여행 중 예상하지 못했던 회복이 있었다. 한국 방문 중 개인적으로 또 소그룹으로 만난 만남들이 있었는데 우연히 이 만남들 모두 믿는 자들의 모임이었다. 교회의 정의가 바로 믿는자들의 모임, 에클레시아 아닌가. 비록 아주 작은 교회들이었지만 이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기도하면서 내가 영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 다시 자각되었다. 영적 감각이 돌아오는 느낌? 내 영이 비로소 숨을 깊게 들이키며 안식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너도 많이 힘들었겠다.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고 해서 완전히 회복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한국 교회나 이 세상의 상황은 그대로였으니. 하지만 한국 방문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 반복해서 말씀하신 게 있었다: (성경)말씀을 읽으라는 것. 말씀을 읽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읽는 사람들이 더 하는데 하는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지속적인 메시지를 주시는 것은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무슨 말씀을 읽을까 하다가 나의 처한 상황이 욥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욥기를 출퇴근길에 드라마 바이블로 들었다.
욥기를 듣는데 대학생 시절 욥기를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났다. 당시 성경 통독 중이어서 욥기를 빨리 끝내버리고 싶은데 욥-친구1-친구2-친구3의 끝나지 않은 이빨 배틀에 심란했던 기억이 나 혼자 큭큭댔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뭐랄까, 욥에게 완전 몰입하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의뢰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알 수 없는 고난이었고 위로하겠다고 온 친구들은 니가 죄를 지었으니 벌 받는다는 소리나 하고 있고.
재산이 날아가고 자녀들이 죽고 몸이 상하는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탈인간급 멘탈이었지만 친구들과의 도돌이표 언쟁에서 점점 멘탈이 털리고 결국엔 무너져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욥을 보는데 그 모습과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눈물이 났다. 나도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질문들에 답을 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어느 순간 나조차도 답이 고갈되고 바닥난 내 믿음을 보며 참담해했기 때문에.
그때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신다. 그로기 상태에 있는 욥에게 하나님이 위로와 이 고난의 배경을 설명해 주실 것 같았건만 정작 하나님은 위로는 개뿔 욥에게 넌 이거 아느냐 저거 아느냐는 질문만 60개를 던지신다. 불경스런 생각이지만 그 질문들을 듣는데 속으로 '하나님 미쳤나? 왜 저래?' 하는 생각을 했다.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사람한테 채찍을 휘두른다는 생각이 들어 매우 불편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십자포화 질문들이 끝나고 욥의 반응이 다음 장에 나온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 42:6)
이 말씀이 내 신앙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이 말씀을 듣는 당시의 느낌을 글로 완벽히 재현할 순 없지만 이것이 내가 행할 바인 것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난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욥에게 하신 모든 질문은 욥이 절대로 알 수도 없고 대답할 수도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대답할 수 있는 신의 영역에 걸친 질문들이었다. 욥이 납작 엎드려 회개를 한 것은 그러한 질문들을 통해 자기가 아는 것은 정말 쥐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은 상상할 수 없는 차원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나의 회개도 욥과 동일하다. 이 세상에 악이 범람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내가 보는 시점에서 그럴 뿐, 하나님은 당신의 영역에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 하나님의 역사를 나의 작디 작은 머리로 재단하려 한 것을 회개했다.
악을 당장 제거해 버리시지 않는 이유를 나는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기에 악인을 멸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신다는 시편의 말씀을 읊조리게 된다.
그렇게 다시 제자리로 나는 돌아왔다.
여전히 불의에 분노하고 악의 범람함을 탄원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의 매일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묻는다.
어떠한 큰 일을 하기보단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다보면,
그가 예비하신 크고 작은 서프라이즈를 보게 될 것을 믿는다.
또한, 나팔 불며 그가 오실 때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