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 지경이 됐니
신앙의 방황기에 썼던 일기다. 그래봤자 7개월 전의 일기구나.
내가 무엇 때문에 이리 힘들어하는지를 구체화하고 싶어 적었던 일기다. 이 일기에서 제기한 의문들을 기록으로 남겨놓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 들어 온라인 공간에 적어본다.
참고로 신앙의 방황기를 끝낸 기록은 여기에: https://brunch.co.kr/@hihogyu/59
2022년 5월 7일 (토)
네이버 베도에 '예수쟁이 다이어리'라는 웹툰이 있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기독교에 회의적이던 작가가 예수님을 만나고 또 교회활동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부분들을 주로 올리는 웹툰이었다. 전형적인 한국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새신자였고 예수님을 만났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뭐랄까, 연애를 처음 해보는 소년을 보는 느낌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불붙는 듯하는, 어떤 헌신도 감사하게 소화해내는 순수한 시기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현실을 직시하게 되듯이, 작가가 마주하게 될, 또 고민하게 될 한국교회의 풍토와 신학의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웹툰을 그리는 목적이 '하나님의 꿈'이라고 명시해 놓은 부분에서 한동대가 '하나님의 대학'을 표방한 생각이 났다. 그 초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욕망과 생각이 혼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애초에 모태신앙이 아니었으니 기왕 믿기로 한 거 많은 질문들을 던지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시험해봤으면 하는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그 선한 의도대로 인도해 가시길 바라며.
어찌 됐든, 오늘은 교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려 펜을 들었다.
교회는 믿는 자들의 모임으로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목적, 믿는 자들의 믿음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코이노니아의 목적이 있는 것 같다. 여기에 전도, 교육, 훈련 등등의 추가적인 목적이 있을 수도 있지만 핵심은 예배, 그리고 동역인 것 같다. '믿는 자들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예전에는 필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신앙생활이란 내 인생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며 그분의 선하심을 믿고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끊임없이 찾는 적극적인 태도를 말한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나님과 긴밀히 소통하는 관계를 맺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일치하고자 함이다.
'신앙생활'의 범주가 지극히 개인적인 범주에만 머물러 있으며 하나님의 뜻이란 미명 하에 나의 뜻을 관철시키고 성도의 성숙이 아닌 교회의 성장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 현실의 거대악에는 침묵하고 만만한 동성애자들이나 순응적인 교인들에게만 정죄를 가하는 비겁함. 사회, 정치, 과학 분야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는 사역자들.
'나'에만 집중하는 신앙생활 - 신앙 만능주의/선민의식
한국 교회에 팽배한 '신앙 개인주의'라 생각한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것이 특징이며 나의 생각이나 감정이 어떠한가 가 중요하다. 물론 표현은 '하나님의 주시는 생각이나 감정'이라고 하지만 많은 경우 자신의 생각과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확실한 '말씀'을 추구하지만 이 또한 자의적 해석이 많이 들어간다. 어디까지가 믿음의 영역인지는 아마 하나님은 아실 것 같다. 감사하게도 방법이 좀 서투르더라도 하나님은 그 의도를 보시고 기뻐하실 것이다. 하니만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고 내가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내 생각이나 감정에 한번 더 의구심을 가지고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문제는 자잘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매일을 살아간다는 소위 신앙이 좋은 사람들의 특징은 그 direct 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선'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나와 내 공동체가 추구하는 것 이외는 '악'이라고 규정짓는 몹쓸 습관이 몸에 베이기 시작한다. 성경을 잘 안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린다고 착각하는 자들은 비단 목회자들 뿐만 아니라 성도들 가운데서도 빈번하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바리새인이 되어가고 예수님을 또 못 박는 것이다.
신학의 부재와 교양/전문성(지성)의 부족 때문이라 생각한다. 계몽주의의 폐해도 겪어봤고 반지성주의도 겪어봤음에도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반지성주의를 향해 달려가는 듯하다.
목회자들의 권위가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분야 전문성보다 우선하며 이것은 목회자와 성도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뜻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영성과 성도들의 삶과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돕는 지성이 목회자들에게 부족하며 성도들은 생각 없이 목회자의 말을 수용하며 추종한다는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에 교회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에 대한 고찰이 없다. 즉 신학이 없다. 점점 깊어지는 빈부격차의 문제, 남녀/세대 간의 혐오 문제, 기득권층의 부패와 초법적 카르텔의 문제, 인구절벽의 문제, OECD 자살률 1위, 교육제도, 남북미중일 관계 등등 믿는 자들이 나서서 사회를 선도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한데 실상은 큐티를 하며 소소하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다고 만족하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하나도 짠맛이 없는 소금이 되는 것이다.
조금 더 신랄하게 비판하자면 루틴 하게 반복되는 주일성수, 기도회, 큐티, 성경통독을 통해 난 괜찮은 크리스천이다, 충분히 내 할 일을 다했다고 자위하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주위에 산적한 문제들을 향해 언젠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겠지 하고 하나님께 책임을 떠넘기거나 고급스럽게 '나의 사명'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난 내 주위 이웃에게 집중하는 사명이라며. 하지만 이런 말 하는 사람 치고 진짜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전도대상자'로 삼았기 때문에 그 목표를 위해 잘해주는 것을 제외하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유행같이 하지만 그것이 공허한 구호일 뿐인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을 때에 마땅히 나타나야 할 사랑과 공의가 크리스천 집단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는 것이 오늘의 교회 아닌가? 매주 드리는 예배와 모임들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는지 점점 희미해진다. 하나님께서 그루터기만 남기시고 나무를 통째로 베어버릴 시기가 점점 가까워짐을 느낀다.
순수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지금 나와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다. 왜? 열매가 없으니까. 영화 메트릭스의 메트릭스가 교회가 된 것 같다. 현실을 외면하고 신앙 안으로 숨어버리기 가장 좋은 곳이니까.